[시네마] 다르덴 형제 감독의 '로나의 침묵'다큐와 극영화 기법 넘나들며 새로운 형식미 발견

벨기에 출신의 형제 감독인 장 피에르 다르덴(Jean-Pierre Dardenne)과 뤽 다르덴(Luc Dardenne)은 오늘날 세계영화사의 흐름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지 오래다. 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나름대로 영화 경력을 쌓아온 다르덴 형제는 1987년 ‘거짓’이라는 제목의 극영화로 전환하면서 새로운 영화언어를 모색했다.

그러나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그들이 두 번째로 만든 극영화 ‘약속 La Promesse’(1996)이 유럽의 소규모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다르덴 형제의 존재를 알렸지만, 아직은 회의적인 시선도 많았다. 마침내 다르덴 형제 감독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실직에 실직을 거듭하면서 사회에서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는 20대 여성 로제타의 방황과 고통의 나날을 그린 ‘로제타 Rosetta’ (1999)가 그 해 열린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이다. 당시 경쟁부문에는 데이비드 린치, 페드로 알모도바르, 알렉산더 소쿠로프 그리고 짐 자무시 같은 영화사를 수놓은 쟁쟁한 감독들이 참가하여 경쟁을 벌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준비된 것이었다. 이후 다르덴 형제는 칸이 사랑하는 영화인이 됐다. ‘아들 Le Fils’(2002)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더 차일드 L'enfant’(2005)로 황금종려상을 그리고 ‘로나의 침묵 Le Silence de Lorna’(2008)으로 각본상을 잇달아 수상을 했던 것이다.

다르덴 형제에게 황금종려상을 연거푸 안겨준 ‘더 차일드’야말로 그들의 영화세계가 집약적으로 담긴 이 시대의 진정한 걸작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내가 말로만 듣던 다르덴 형제의 명성을 직접 확인하게 된 것도 이 작품을 통해서였다. 10대 동거녀가 아이를 낳자 역시 철없는 10대 동거남이 아이를 불법 입양업자들에게 팔아넘겼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아이를 되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청소년 사회문제의 핵심적 내용을 섬뜩하리만치 담담한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영화를 보고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김호준 감독의 ‘제니, 주노’(2005)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땅의 철없는 10대들이 일단 일을 저질러놓으면 뒷감당은 결국 부모가 대신 하는 것으로 유종의 미를 거둔다는 얘기였다. 의식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

‘로나의 침묵’은 어떤 영화인가? 알바니아 출신의 한 여성이 벨기에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위장결혼을 하고, 마침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그동안 투자한 밑천을 뽑기 위해 또다시 외국인에게 위장결혼을 해준다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로나(아르타 도브로시)는 명목상 남편인 클로디(제레미 레니에)와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동거인데다가 그가 극심한 마약중독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약조건에 명기되지 않은 클로디의 자잘한 요구들이 그녀를 짜증나게 만든다. 약물과용으로 점점 무기력해지는 클로디를 연민(憐憫)의 정으로 돌봐주던 로나는 어느 날 그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로나에게 의지하여 새로운 삶을 찾으려던 클로디는 안타깝게도 세상을 뜨고 만다.

로나는 클로디와 합의이혼을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의 위장결혼을 이제 막 성사 시키려던 참이었다. 어쨌든 러시아 출신의 돈 많은 남자와 사귀게 된 로나는 한밑천 잡을 꿈에 부풀어 있지만, 그녀의 몸에 임신의 조짐이 나타나면서 위장결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리하여 로나의 뒤를 봐주고 있는 위장결혼 주선자인 파비오(파브리지오 롱기온)는 상품 가치가 떨어진 로나를 다시 알바니아로 돌려보내려 한다.

사실 영화의 내용만을 놓고 봤을 때는 다르덴 형제가 왜 위대한 감독군에 들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영화에는 특별한 영화적 기교도 없고 내러티브상으로 보아도 그다지 정교하다거나 탄탄하다는 인상을 받지 못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극중에서는 클로디가 약물과용으로 사망했는지, 아니면 로나의 후견인인 파비오에게 살해를 당한 것인지 조차 분명히 않다.

영화의 결말에서는 파비오의 수하에 의하여 알바니아로 보내지고 있던 로나가 자신을 살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수하를 살해(?)하고 도망쳐 숲속의 오두막으로 은거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하지만 이조차도 내러티브상에서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파비오가 단순히 로나를 돌려보내려 했는지 아니면 죽이라고 사주를 했는지가 분명치 않은 것이다.

게다가 영화에서는 로나가 자신이 클로디의 아이를 임신한 것으로 철썩 같이 믿고 오로지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탈출을 감행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녀가 병원에서 만났던 간호사에 따르면, 임신은 오진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일까? 이처럼 다르덴 형제 감독은 극중 캐릭터들이 처한 한계적 상황만을 툭 던져 놓을 뿐 그 이상의 설명은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그리하여 정교한 내러티브 구조에서 오는 막판의 반전이라든가 뒤집기 같은 것을 다르덴 영화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 마치 한창 몰입하던 이야기가 도중에 중단된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덴 영화의 매혹(attraction)에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도대체 칸영화제는 무엇 때문에 장장 10여 년 동안 다르덴 형제에게 구애를 했던 것일까? 게다가 비평가들은 어째서 다르덴 형제의 필모그래피에 그토록 찬탄을 해대는 것일까?

일찍부터 다르덴 형제의 영화세계에 깊이 침잠해있는 소장 평론가 서대정에 따르면, “새로운 형식에 대한 목마름”이 다르덴 영화에 열광하게 하는 주된 요소라는 것이다. 강렬한 주제의식으로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영화세계를 펼쳐온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새로운 형식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이러니컬하게 들린다.

무슨 말인가? 다 알다시피 다르덴 형제는 오랜 다큐멘터리 제작경험을 했고, 그리하여 다큐적인 기법과 극영화 기법 사이를 넘나드는 극한적인 리얼리즘 형식으로 가장 첨예화된 사회문제에 메스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별 다른 대안 없이 비판만 해대는 방관자들이 결코 아니다.

그들의 영화 속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불변의 윤리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이 리얼리즘의 형식으로 재현하려는 것은 일상적 시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실재의 불가해(不可解)가 아닐까?



김시무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