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긴 여운을 남기는 응시와 경청의 카메라

혈연과 혼인으로 만들어진 집단과 구성원. 가족의 사전적 정의는 이처럼 단순명료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던가. 모두가 통감하듯, 가족을 만드는 건 애증의 더께다. 누구보다 가깝다고 믿고 싶지만 종종 남보다 멀고, 뼛속까지 다 안다고 자부하고 싶지만 문득 소스라치게 낯설다.

사랑과 감사의 표현은 남에게 하기보다 열배 쯤 힘들고, 생채기를 내는 건 백배 쯤 쉽다. 이렇게 켜켜이 쌓인 감정의 더께에 이성과 논리 따윈 이도 안 들어간다.

이런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는 대부분 두 극단에 위치한다. 한 편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애용해 온 ‘위대한 가족 신화’가 있다. 소통의 부재로 갈등을 빚던 가족이 위기를 겪으며 끈끈한 가족애를 확인한다는 식의 영화들은 “어쨌든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외치며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외면한다. 맞은편엔 안으로 곪아 들어간 문제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는 ‘가족 잔혹사’가 있다.

‘피와 뼈’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가족은 누가 안 보면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말 한바 있다. 가족 잔혹사 영화들은 가족이라는 허울 속에서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억압과 폭력, 몰이해와 무관심이 불러오는 파국을 좇으며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에는 신화도 메스도 없다. ‘가장 보통의 가족’이 있을 뿐이다. 무뚝뚝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다정한 잔소리꾼 어머니, 애교 많은 딸과 넉살 좋은 사위, 아버지의 고집을 꼭 닮은 아들과 참하고 속 깊은 며느리가 모인 1박2일의 소소한 일상이 영화의 전부다. 그럼에도 ‘걸어도 걸어도’가 남기는 파장은 강렬하고 묵직하다. 이미 감독의 전작을 본 적이 있는 관객이라면, 별로 놀랍지 않을 것이다. 고요하고도 강렬한 영화는 그의 전매특허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가족의 점심을 준비하는 어머니(기키 기린)의 분주한 손길에서 시작한다. 어머니는 바지런히 손을 놀리면서도 여전히 요리에 서툰 딸을 핀잔주기에 바쁘고, 아버지(하라다 요시오)는 분주한 부엌은 본체도 안하고 산책을 나선다. 큰 딸 지나미(유)는 연로하신 부모님 걱정에 함께 살기를 권하지만, 부모님은 묵묵부답. 최근 실직한 둘째 아들 료타(아베 히로시)는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편치 않다.

마음이 편치 않은 건, 전 남편과 사이에서 얻은 다 큰 아들을 데리고 시부모집에 가는 료타의 아내(나츠가와 유이)도 마찬가지다. 온 식구를 불러 모은 건 큰 형 준페이. 그 날은 10여 년 전, 바다에서 한 소년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준페이의 기일이다.

어떤 과거는 흘러가 빛바랜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지만, 어떤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를 맴돌며 머무른다. 벌써 10여 년이 흘렀건만, 준페이의 죽음은 이 가족의 오늘을 쿡쿡 찌른다. 아들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길 바랐던 아버지는 큰 아들의 빈자리를 둘째 아들이 채워주길 바랐건만, 의사가 아닌 그림 복원가가 되겠다며 집을 나간 료타가 못내 서운하다.

어머니는 준페이와 사별하고 재혼한 뒤 기일에도 찾아오지 않는 첫째 며느리가 내심 괘씸하고, 사별한 전 남편과 자식까지 둔 채로 료타와 재혼한 둘째 며느리는 은근히 성에 안찬다. 말만 앞세우는 넉살좋은 사위도 때론 밉상이다. 아직까지 형에 대한 자격지심을 지우지 못한 료타는 자신과 형의 과거 에피소드를 혼동하는 부모님이 마뜩치 않다. 며느리는 여전히 자신에게 너무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시어머니가 불편하다.

‘걸어도 걸어도’는 비어져 나오는 이들의 갈등을 응시하고 경청한다. 조용히 바라보고 듣다보면 우리는 그들이 평생을 부대끼고도 알아채지 못했던, 비밀을 듣게 된다. 무뚝뚝한 아버지의 강요 안엔 서툰 애정이 찰랑이고,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 한 구석엔 갈 곳 없는 분노가 으르렁대고 있다는 것. 료타가 도망치듯 집을 떠난 건, 그들의 아픔을 곁에서 지켜볼 자신이 없어서라는 사실도.

꽤나 비겁한 방법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핑계 삼아야만 겨우 삶을 견딜 수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세상 모든 가족의 애증이 애처로운 삶의 몸부림이었음을 일깨운다. 동시에 그걸 깨닫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일러준다. 료타의 독백처럼 “늘 이렇게 한 발씩 늦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로 영화 인생을 시작한 감독답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카메라는 기교에 기대는 법이 없다. 대신 눈여겨보지 않으면 흘려 넘길 어떤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2004년 칸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아무도 모른다>에선 헤지고 짧아진 바짓단, 마구잡이로 자란 머리카락, 때가 덕지덕지 묻은 손을 조용히 응시하는 것만으로 관객의 가슴을 찢어놓더니, 이번엔 낡은 문갑, 구겨진 수건, 깨진 욕실 타일을 비추는 장면만으로 절절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놀라운 경지다. 아마도 이 작품이 감독의 실제 경험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몇 해전 어머니를 잃은 감독은 생전 어머니의 애창곡이었던 70년대 유행가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의 가사에서 이 영화의 제목을 따왔다.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난 흔들려요. 그렇게 흔들려서 당신의 품 속으로” 영화 속 어머니는 아픈 기억이 담긴 이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며 조용히 웃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원했던 목적지는 아닐지라도,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싫지만은 않았다는 듯. 걷고 또 걷다 보면 우리도 그녀와 같은 혜안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