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세자르 샤를로네, 엔리카 페르난데즈 감독의 '아빠의 화장실'민초의 '화장실 소동'은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한 소박한 응원가

전통적인 블록버스터 시즌답게, 여름 극장가엔 외계에서 날아온 로봇 군단이 휘황찬란한 변신 쇼를 펼치며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 압도적인 볼거리로 치자면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을 따라갈 영화는 없겠지만, 뜨거운 울림에 있어선 로봇의 엔진이 인간의 고동치는 심장을 이길 수 없다. 낯선 땅, 라틴 아메리카에서 달려 온 고물 자전거 한 대가 이 자명한 진리에 힘을 싣는다.

세자르 샤를로네와 엔리카 페르난데즈 감독의 <아빠의 화장실>은 1988년 5월8일 우루과이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을 그린 영화. 브라질과 우루과이 접경 마을인 멜로에 ‘사랑과 이해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친히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길을 걷다가도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성호를 긋는 독실한 마을 주민들의 마음이 들뜨는 건 당연지사. 게다가 교황께선 멜로 주민들의 가난한 영혼 뿐 아니라 주린 배도 채워주시는 기적을 행하신단다. 연일 떠들어대는 방송에 따르면, 교황의 얼굴을 직접 알현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수 만 명의 신도가 멜로를 찾아온다는 것.

수 만 명의 신도들에게 간식과 기념품을 판다면, 생각지도 못했던 목돈을 벌 수 있다. 온 마을 주민이 ‘단체 로또’에 당첨된 셈이다. 하늘엔 영광, 땅에는 돈이 있을지니, 아멘. 가난한 아빠 비토(세자르 트론코소)에게도 교황 순방은 놓칠 수 없는 기회다.

부지런히 굴러가는 자전거 바퀴만이 그림자를 드리운 마른 흙길. 서정적인 기타 선율과 경쾌한 비트가 어우러진 음악 위로 ‘드르륵 드르륵’ 자전거 바퀴의 고된 마찰음이 부서진다. <아빠의 화장실>은 비토를 비롯한 마을 아빠들의 ‘여행’을 따라가며 시작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상대적으로 윤택한 브라질과 우루과이 국경을 넘나들며 소소한 생활용품을 밀수하는 일을 그렇게 부른다.

몇 십 킬로그램의 무거움 짐을 숨겨 날라야 하는 ‘여행’은 쉽지 않다. 요즘 들어 비토는 부쩍 여행이 힘들어졌다. 안전하게 밀수품을 나르기 위해선 험한 산길로 가야 하지만, 툭하면 체인이 빠지는 고물 자전거와 아픈 무릎으로는 어림도 없다. 어쩔 수 없이 국경 수비대가 진을 치고 있는 평지로 향하지만, 삼엄한 수비대에게 들통 나 매번 물건을 압수당하기 일쑤. 비토의 꿈은 국경 수비대를 따돌리고 산길을 달릴 수 있는 오토바이 한 대를 장만하는 것이다.

어느 날, 밀수품을 모두 뺏긴 비토는 속상한 마음에 마을 술집에서 진탕 술에 취한다. 술에 취한 중에도 그의 귀에 꽂힌 교황 순방 소식. 비토는 아주 특별한 아이디어를 낸다. “교황을 따라 지체 높으신 손님들이 올 텐데, 아무데서나 볼 일을 볼 수 있겠어? 이 마을엔 변변한 화장실 하나 없잖아. 아주 근사한 화장실을 짓는 거야. 그리고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빌려주는 거지!”

‘교황(papa)'을 위한 ’아빠(papa)'의 화장실. 이 화장실 하나만 있으면, 비토 가족의 모든 꿈이 이뤄질 것만 같다. 비토에겐 신형 오토바이를, 삯빨래하는 부인 카르멘에겐 밀린 전기세와 갖고 싶다던 최신 빨래 세제를, 아나운서를 꿈꾸는 딸 실비아에겐 새 라디오를 선물할 ‘황금 화장실’을 짓기 위해 비토는 전 재산을 쏟아 붓는다.

전력을 다하기는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전 재산을 쏟아 붓는 것도 모자라 은행 빚까지 얻어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멜로 주민들의 얼굴엔 오랜만에 희망의 미소가 핀다.

“신이 우리를 도우실 거야” 카르멘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화장실’의 결말은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언제 한 번이라도 고매하신 윗분들이 민초의 희망을 밟지 않은 적이 있던가. 민초의 희망을 일으켜 세우는 건, 그들 자신뿐이다.

부정한 돈을 거부한 대가로 끝내 화장실을 완성하지 못하고 어둔 식탁에 주저앉은 비토에게 카르멘이 숨겨둔 쌈짓돈 뭉치를 묵묵히 건넬 때, 철없는 아빠의 도전을 향해 실비아가 무언의 응원을 보낼 때, 떠오르는 태양을 뒤로 하고 비토가 미친 듯이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 밟혀 누웠던 희망은 꿋꿋이 일어선다.

우리에겐 아직 낯선 감이 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라틴 아메리카 영화들이 다시 기지개를 켜자 세계 영화계는 열렬한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월터 살레스, <이투 마마>의 알폰소 쿠아론, <21 그램> <바벨>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시 인사이드>의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곤잘레스, <판의 미로>의 길예르모 델 토로와 <시티 오브 갓> <눈 먼 자들의 도시>의 감독이자 <아빠의 화장실>의 제작자인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영화들은 라틴 아메리카 영화의 저력을 드러냈다.

이 영화들의 특징은 라틴 아메리카의 아픈 현실을 인정하되 비관하지 않는 철학에서 비롯된다. 아르헨티나 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도 라틴 아메리카 영화의 힘을 현실의 뿌리에서 찾는다. “서구 평론가들이 이 영화들을 ‘새롭다’고 표현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새롭다는 건 스타일의 힘이지만, 다르다는 건 철학의 문제다. 최근 라틴 아메리카 감독들의 영화는 이 땅의 역사와 문화, 현실의 뿌리로부터 태어나고 있다. 이 뿌리는 지역과 시대를 넘어서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힘이다.”

마찬가지로 낯선 땅, 우루과이에서 벌어진 20년 전 해프닝을 담고 있지만 <아빠의 화장실>은 현대 대한민국의 관객에게도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시티 오브 갓>의 촬영감독으로 강렬하고도 유려한 영상을 선보였던 세자르 샤를로네와 난해하기 짝이 없는 소설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성공적으로 각색했던 엔리카 페르넨데스는 비루한 삶의 단면을 여과 없이 담으면서도 경쾌함과 여유를 잃지 않는 내공을 선보인다.

비토와 카르멘, 악질 국경수비대 멜레조 역의 전문 배우를 빼면 모두 실제 멜로 마을 주민을 캐스팅 해 리얼리티를 극대화 시켰다고. 천천히 움직이는 스틸 사진 같은 마지막 몽타주는 황홀한 수준. 밟혀도 일어나고, 울다가도 금세 웃는 법을 아는 민초의 ‘화장실 소동’은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한 소박한 응원가로 손색없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