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김곡 감독의 '고갈'결핍의 근원에 대한 질문… 낯설고도 익숙한 이미지로 파격 꿈꿔

갈증과 배고픔을 혼동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다이어트의 기본원칙 중 하나라는데, 삶의 무게를 줄이는 데도 꽤 유용하게 쓰인다.

결핍을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 과정에서 결핍의 근원이 무엇인지 되돌아보지 않으면, 엉뚱한 주머니를 채워 넣으며 계속 결핍감에 시달린다.

'비타협 창작집단' 곡사를 통해 꾸준히 실험영화를 만들어 온 김곡 감독의 신작 <고갈>도 결핍의 근원에 대한 질문으로 다가왔다.

마실 물은 썩어버린 개펄이 전부고, 배고픔을 채울 음식이라곤 제 몸뚱아리가 전부인 척박한 세상에 살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결핍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세간엔 <고갈>이 '센'영화로 소문났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단순하게 이 영화의 줄거리만 봐도 순한 영화는 아니다. 부랑자로 살던 남자는 우연히 공장지대 개펄에서 약간 실성한 것처럼 보이는 여자를 줍는다.

그리고 여관에서 그녀에게 몸 파는 일을 시키며 생계를 유지한다. 영화에서 남자는 여자가 매춘을 하는 동안 문 밖을 지키고 앉아 '수간' 포르노를 보며 시간을 때운다.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이 장면을 근거로 삼아 '제한상영가' 등급을 내렸고, 감독이 이 장면을 삭제해 결국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문제의 장면은 검은 화면에 붉은 'X' 표시로 잠시 등장한다.

하지만 원 상태로 개봉됐다고 해도 이 몇 장면으로 영화 전체가 특별히 더 '선정적'으로 보이진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김곡 감독이 창조해 놓은 퍽퍽한 세상은 보는 이의 성적 호기심마저 거세시킬 만큼 메말라 있다.

하지만 <고갈>은 생각만큼 '센'영화 도 아니다. 128분의 러닝타임 중 초반부터 100분이 흘러갈 때까지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건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척박한 대지에 박혀 스멀스멀 연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굴뚝의 위용이다.

여자는 틈만 나면 그 굴뚝을 향해 간다. 그리고 좋은 건지, 두려운 건지 구분하기 힘든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올려다본다. 한편 남자는 그런 여자를 괴롭힌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치고받지만, 살기가 느껴지지 않으니 그저 장난처럼 보이는 순간이 대부분이다.

꼬마 남자아이가 관심을 끌기 위해 툭 치고 도망가듯, 남자는 굴뚝에 빠져있는 여자의 관심을 제게 돌리기 위해 호루라기를 불고, 발길질을 한다. 그렇다고 '고갈'을 '센 멜로' 쯤으로 여기는 건 섣부른 판단이다.

영화는 후반 30분을 위해 앞서 100분 간 관객에게 느린 복식호흡을 연습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통과 괴성의 통곡이 사무치는 '죽음의 탄생' 순간,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관객도 결핍의 근원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간 김곡 감독은 '비타협 창작집단' 곡사를 통해 파격적인 이미지 언어를 들려주는 실험영화를 발표해왔다. 형제 김선 감독과 공동 작업을 하던 김곡 감독에게 '곡사'는 첫 개인 장편.

창작집단의 설명을 '비타협'이라고 못 박았을 만큼, 곡사의 작품들은 창작자의 실험적인 면모를 강하게 밀어붙인다. 전통적인 드라마 트루기 방식의 '조곤조곤 설명하는 영화'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고갈>도 마찬가지다. 스토리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게다가 이와 비슷한 '센' 이야기는 이젠 보편적인 수준이다. 대신 김곡 감독에게 영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노력"이다.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아닌, 이미지의 나열에서 오는 감정의 흐름과 증폭과정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김곡 감독은 <고갈>은 "불안의 이미지를 캐스팅한 영화"라고 소개했다. 그의 소개대로, 영화는 결핍의 근원을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여자의 몸짓과 남자의 절망이 불안하게 계속된다.

영화의 주인공인 '불안'이 돋보일 수 있도록, 감독은 모래 입자처럼 거칠고 뿌연 화면과 웅웅거리는 기이한 소음을 배경으로 깔았다. 수퍼 8밀리를 35밀리 필름으로 늘리는 과정을 통해 화질 입자를 도드라지게 키웠고, 그 위에 약품을 입혀 필름 표면을 일부러 손상시켰다.

덕분에 영화는 내내 칼칼한 공기와 다음 장면이 뚝 끊길 것 같은 조마조마한 분위기를 유발하는 데 성공했다. 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옆에서 색색거리는 것 같은 소음의 집합 역시 갑갑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이런 실험에 있어서 <고갈>은 꽤 성공적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정 상태를 설명하라면 '쾌'보다는 '불쾌'에 가깝지만, 영화 자체가 모욕감을 느끼게 하진 않는다. 오히려 몇몇 장면에서는 몽환적으로 따스하기까지 했다.

영화는 퍽퍽하고 황량하지만, 입 안에 모래가 한 움큼 돌아다니는 것 같은 신체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부분이 <고갈>의 가장 아쉬운 부분이 아닐지 의심이 들었다. 이것은 감독이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남긴 '희망의 온기'로 읽히지 않는다. 혹은 바닥을 치고 올라온 카타르시스의 후련함도 아니다.

극도로 강렬하고 파격적인 이미지를 몰아붙여 에너지의 불꽃을 일으켰건만, 심지가 약해서 다 터뜨리지 못한 폭탄을 본 것 같다. 그 심지는 '인간'에 대한 탐구가 아닐까 싶다.

<고갈>은 불안한 '세상'을 창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안에서 사는 '인간'의 불안은 꽤 도식적이고 익숙하다. 여자와 남자, 마지막에 파국을 불러일으키는 미스터리한 중국집 배달부의 행동은 종종 불안한 세계와 호흡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무대 위에 동떨어져 있다.

하지만 이 아쉬움이 <고갈>의 실험을 불발로 만드는 건 아니다. 조곤조곤 설명하는 친절한 영화에 질린 관객이라면, 파격적인 이미지의 웅얼거림이 만들어 낸 둔기 앞에 머리를 내밀어 보는 것도 신선한 경험이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 통증이 조금 더 날카롭길 바라는 마음이다. 곡사의 다음 영화가 기대를 만족시켜 주길 바란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