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대화의 서스펜스, 폭력의 스펙터클 그리고 복수의 허망함

주성치, 우디 앨런, 쿠엔틴 타란티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고유의 취향이다. 그들은 자신의 취향을 그러모아 하나의 완벽한 세계를 창조한다. 그들의 원더랜드에 입장하기 위해선 반드시 '취향의 동의서'가 필요하다.

상상 그 이상의 슬랩스틱과 오물 퍼레이드에 킬킬거릴 자신이 있다면 주성치 월드로, 현학적인 대화와 우아한 비극에 취하고 싶다면 우디 앨런 월드로, 시종일관 끝을 알 수 없는 수다와 눈 한 번 꿈쩍하지 않는 신체훼손의 폭력에 홀리고 싶다면 쿠엔틴 타란티노 월드로 찾아가면 된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이 세 명의 감독이 창조한 '원더랜드'는 은근히 통하는 데가 있다. 아마도 그들이 호모루덴스(유희의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영화가 관객에게 원하는 건 단 하나. 함께 놀자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놀이에 도가 튼 세 감독은 점점 더 많은 관객과 함께 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편하게 말하자면 그들의 영화가 '대중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뜻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신작 <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그가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02)부터 쌓아온 취향의 결정체임과 동시에, 지금까지 타란티노를 몰랐던 관객들도 흥겹게 놀 수 있는 시끌벅적한 놀이터다.

<바스터즈>의 시놉시스는 간단하다. '나치에게 복수하고 히틀러를 죽여라'. 이 역사적인 복수극의 주인공은 여러 명이다. 나치 장교이자 '유대인 사냥꾼'으로 이름 높은 한스 란다(크리스토프 왈츠)에게 일가족을 몰살당한 유대인 여인 쇼사나(멜라니 로랑)와 각자의 사연으로 독일에서 도망친 유대인 특공대 '개떼들'과 그들의 우두머리 알도 레인 중사(브래드 피트). 누군가는 개인적 복수를 위해, 누군가는 광포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나치 몰살작전'을 계획한다.

'1941년,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시작하지만 <바스터즈>는 '역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타란티노가 창조한 허구의 인물들이 '역사'를 무대로 한 판 신나게 놀고 갈 뿐이다.

이 사실을 확실히 강조하는 건 첫 장면의 자막이다. '옛날 옛적'으로 시작하는 설명과 다섯 챕터로 나뉜 구성은 이 영화가 '동화'임을 강조한다. 잔혹한 동화의 첫 번째 주인공은 쇼사나다. 선량한 프랑스인에게 도움을 받아 마룻바닥에 숨어있던 쇼사나의 가족은 한스 란다의 간교한 수색작전에 의해 몰살당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쇼사나는 한스 란다의 비웃음을 뒤로 하고 도망친다.

시간이 흘러 고모의 유산을 받아 파리에서 극장을 운영하며 살아가던 쇼사나는 우연히 만난 독일의 전쟁 영웅 프레드릭(다니엘 브륄)에게 열렬한 구애를 받게 된다. 프레드릭은 자신이 주연을 맡은 전쟁 홍보영화 시사회를 쇼사나의 극장에서 하자고 나치 고위층을 설득하고, 쇼사나는 가족의 원수 한스 란다를 비롯해 나치 괴수 히틀러까지 저세상을 보낼 테러를 계획한다.

두 번째 복수의 주인공은 나치군에게 '아파치 알도'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알도 레인 중사와 개떼들이다. 미군 정보부 소속의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나치 수뇌부를 암살하라는 임무를 전달받는다.

독일 최고의 여배우이자 영국의 이중첩자 브리짓 본 하머스마크(다이앤 크루거)의 도움을 받아 쇼사나의 극장 시사회에 침투해 엄청난 양의 폭탄을 터뜨린다는 것이 이들의 계획. 하지만 접선 장소에서 우연히 만난 독일 장교에 의해 개떼들의 정체가 들키면서 히틀러 암살작전은 점점 꼬여만 간다.

<바스터즈>의 백미는 끊이지 않는 등장인물 사이의 대화다. '수다'는 이미 타란티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지만, <바스터즈>는 지금까지의 '수다'에서 한 차원 더 업그레이드된 모습이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챕터에서 한스 란다가 쇼사나의 가족을 숨겨주고 있는 프랑스 농부를 떠보며 조용히 협박하는 대화는 서로의 머리에 총부리를 대고 있는 것보다 스릴 넘친다. 한 편 세 번째 챕터에서 개떼들과 접촉한 이중첩자 브리짓이 주변 독일군들의 관심을 돌리려 끊임없이 주절대는 신이나 억양이 다른 영국군 출신 스파이를 독일 장교가 눈치 채는 장면의 대화 역시 책상 아래 시한폭탄이 째깍거리는 것만큼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 중에서도 한스 란다가 등장하는 대화 신은 웬만한 공포영화 뺨치게 소름이 끼친다. 그가 우연히 만난 소샤나와 파이를 먹으며 대화하는 장면, 이중첩자라는 확신을 갖고 브리짓을 신문하는 장면은 '대화의 서스펜스'가 무엇인지 확인시켜 준다.

대화의 서스펜스 사이사이를 메우는 것은 폭력의 스펙터클이다. 이미 타란티노의 원더랜드에 입성한 관객들은 익히 알고 있겠지만,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 불리는 타란티노의 '액션'은 '억'소리가 절로 날 만큼 비정하다.

'아파치 알도'라는 별명답게 알도 레인 중사는 사살한 나치 군인들의 머리 가죽을 쓱싹 벗겨내는가 하면, '곰 유대인'이라는 별명의 도니는 야구방망이로 나치 장교의 머리통을 다져놓는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유머를 잊지 않는 감독의 배려 덕에 킬킬거릴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바스터즈>는 복수의 허망함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한다. 주인공들은 뜨거운 복수를 이루기 위해 달려왔고, 누군가는 꿈에 그리던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다지 통쾌하지 않다.

타란티노 감독은 '복수'와 '구원'의 근본적 물음에 대해서는 꽤 진중한 사색을 남겨준다. 과연 복수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92)부터 계속되고 있는 타란티노의 질문은 <바스터즈>에서도 유효하다.

배우들의 협연도 <바스터즈>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이젠 '마네킹 배우'의 꼬리표를 완전히 떼어낸 브래드 피트는 말의 꽁지를 집어 삼키는 군인 억양을 뱉어내며 '아파치 알도'를 능청스럽게 연기한다.

그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은 1960~70년대 전쟁 영화의 꼴을 따 온 <바스터즈>에서 완연히 빛을 발한다. 쇼사나 역의 멜라니 로랑과 브리짓 역의 다이앤 크루거 역시 고전 배우 같은 우아함을 발산하는데, 내공 면에서는 다이앤 크루거의 압승이다. 모든 배우가 훌륭했지만, 단 한명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브래드 피트에겐 미안하지만) 한스 란다 역의 크리스토프 왈츠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 중견배우는 시종일관 정중하고 우아한 말투와 행동거지로 몸서리쳐질 만큼 서늘한 '악의 얼굴'을 보여준다. 어찌나 매력적인지 그가 등장하기만 하면, 다른 배우들의 얼굴이 희미해질 정도다(브래드 피트 조차도!). 만약 타란티노의 수다와 폭력이 '취향'에 맞지 않는 관객일지라도, <바스터즈>의 배우들에겐 반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