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R. J. 커틀러 감독의 한 권의 9월호 가 탄생하기까지, 숨 가쁜 9개월의 기록

<셉템버 이슈>에 관한 관객의 '이슈'는 하나다. 과연 '프라다를 입은 악마'의 실체는 무엇인가. 패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관객이라면, '프라다 악마'의 무시무시한 이름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미국 전체 국민의 10%가 매달 구독하는 패션잡지 미국판 '보그'를 21년간 진두지휘해 온 편집장 안나 윈투어.

연간 3천억 달러가 오가는 패션계는 총과 장갑차 대신 휘황찬란한 '옷'으로 무장한 이들의 살벌한 전쟁터다. 안나 윈투어는 '꽃들의 전쟁터'에서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는 전사이자, 패션이라는 종교를 이끄는 교황이고, 블랙 앤 화이트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화려한 저승사자이며,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부하직원들의 심장에 날 선 비수를 박아 넣는 얼음 여왕이다. 패션에 관심이 없는 관객이라면, 미국 '보그' 에디터 출신 소설가 로렌 와이스버거의 베스트셀러 칙릿과 동명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마녀 편집장 '미란다'를 떠올리면 된다. 미란다의 실제 모델이 바로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다.

R. J. 커틀러 감독의 <셉템버 이슈>는 바로 그 안나 윈투어의 코앞에 카메라를 들이 댄 흥미로운 다큐멘터리이다. 부제를 붙이자면 '한 권의 9월호 보그를 피우기 위해, 사람들은 그렇게 밤을 샜나보다' 쯤 되겠다. 패션 잡지의 9월호는 다른 잡지의 신년호만큼의 상징성을 가진다. 가을/겨울 시즌을 맞아 뉴욕, 런던, 파리, 밀라노의 런웨이에 '새로운 1년'을 알리는 패션 아이템이 등장하는 시기가 9월이다.

세계적인 패션 잡지 '보그'는 패션계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고, 지난해보다 더 광고가 많이 붙는 '살인적인 두께'의 9월호를 완성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친다. <셉템버 이슈>는 '보그'의 수장 안나 윈투어를 중심으로 '보그'의 구성원들이 최고의 9월호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9개월을 카메라로 채집한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는 안나 윈투어이자, 안나 윈투어가 아니다. 예를 들어 미란다는 비서 앤드리아가 사다주는 스타벅스 커피를 먹지만, 안나 윈투어는 직접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를 사 마신다. 윈투어가 개봉 뒤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는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는 '연기의 신' 메릴 스트립이 세상에 알려진 윈투어의 모습 중에서 가장 영화적인 얼굴만 오려내 창조한 인상적인 콜라주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영화일 뿐, 오해하지 말자'는 구호를 외치기라도 하듯, <셉템버 이슈>는 안나 윈투어의 조용한 인터뷰를 통해 영화를 시작한다. 예의 그 똑떨어지는 단발머리를 하고 '샤넬'을 휘감은 안나 윈투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패션계에 대한 편협한 시선을 반박한다. "패션은 배부르고 등따신 골빈 한량들의 신선 놀음"이라는 일간의 비아냥에 대해 안나는 "패션에 무지하고, 패션에 대한 무지를 두려워하는 어떤 사람들은 아예 무시와 비난하는 쪽을 택한다"고 일침한다.

이 인터뷰는 기묘한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하나는 '패션 지상주의자 윈투어'의 면모다. 그녀는 진심으로 패션의 파워를 신봉하고, 패션은 곧 예술이라 믿으며, 패션이 곧 자신의 삶이고, 열정이자 종교임을 선포한다. 한 편으로 그녀가 패션업계의 큰 손으로 성공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무시와 비아냥을 들어야 했는지,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대형 슈퍼의 의류코너에 널린 청바지보다 캐롤리나 헤레라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더 좋아하는 게 골빈 계집애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는 아니다." 이 말 속엔 한때 패션을 무시하는 누군가에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분통을 터뜨렸을 안나 윈투어의 과거가 담겨있다.

하지만 <셉템버 이슈>는 '안나 윈투어'의 누명을 벗기는 게 목적은 아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안나 윈투어와 '보그'라는 패션 아이콘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다. 전설처럼 전해지던 그녀의 '권력'이 첫 번째 볼거리다. 안나가 도착해야 비로소 쇼를 시작하는 뉴욕, 파리, 런던, 밀라노의 호사스런 런웨이, 새 시즌 론칭을 앞두고 안나의 칭찬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안절부절 못하는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 그녀의 '추천' 한 마디로 패션계의 신성 디자이너가 탄생하는 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볼거리는 '보그'를 만드는 수많은 사람들이다.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화보를 창조하는 최고의 에디터들, 로마를 누비며 표지 촬영을 하는 셀러브티리 시에나 밀러, 피를 말리는 마감 전쟁은 '각본 없는 드라마'. 그 과정엔 패션의 흐름을 내다보고 정확한 시점에 변화를 시도하는 안나의 천재적인 능력에 대한 감탄과 독선에 가까운 그녀의 독불장군 업무 스타일에 대한 불평이 켜켜이 쌓인다.

패션계 혹은 잡지계에 관계된 관객이라면 <셉템버 이슈>는 공감 100%의 업무 보고서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관객이라 할지라도 <셉템버 이슈>는 패션과 삶, 일과 삶에 대한 훌륭한 선배들의 조언서가 된다.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안나와 '기 싸움'이 용납된 '보그'의 수석 패션 에디터 그레이스 코딩턴은 안나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일과 패션과 삶에 대한 따뜻한 조언을 전한다.

둘 중 하나를 보스로 고르라면, 누구나 차가운 안나 보다는 따뜻한 그레이스를 보스로 두고 싶겠지만, 잘 들여다보면 안나와 그레이스는 결국 동전의 양면 같다. 개인적 성향은 극과 극이지만,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패션에 대한 확신과 열정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안나 윈투어'는 '얼음 여왕'일지언정 '악마'는 아니다.

촬영이 장장 9개월 간 지속됐다는 걸 믿기 힘들만큼, 그녀는 매 순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똑같은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그녀의 유니폼이 된 '보브 단발'과 '샤넬 선글라스' 때문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중요할수록 빠르고 단호한 판단으로 일을 처리하는 능력 때문이다. 그녀는 훌륭한 보스의 조건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잡지의 얼굴인 표지 촬영 결과물이 엉망으로 나왔을 때, 안나 윈투어는 우리의 예상처럼 불같이 화를 내지 않는다. 대신 최대한 신속히 대안을 만들고, 현재의 여건에서 최고의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상황을 조율한다.

드디어 2007년 '보그'의 '셉템버 이슈'(9월호)가 인쇄되어 가판대에 깔릴 때, 관객은 비로소 '패션 여제' 안나 윈투어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감탄한다. 패션엔 일자무식인 관객이지만 <셉템버 이슈>를 굉장히 즐겁게 봤다. '인생도 잡지도 이미 지난 마감에 연연하지 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겐 또 내일의 마감이 다가오고 있으니. 사력을 다해 인생의 마감을 치르되, 정말 화를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면 깨끗이 털고 일어서면 된다.' 눈도 호강하고, 삶에 대한 현명한 조언을 얻었으니 일석이조.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선배를 만난 기분이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