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피터 잭슨 감독의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를 단절시킨 피터 잭슨의 첫 영화가 내포한 의미

소문이 흉흉하다. 21세기 '판타지의 제왕' 피터 잭슨 감독의 신작 <러블리 본즈>가 기대에 비해 영 신통치 않은 북미 박스오피스 성적을 기록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처음엔 '뜻밖의 이변'이라고 여겼다.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에게 '맞춤복' 같은 프로젝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크게 세 가지 요소가 그와 딱 맞아 떨어졌다. 첫째는 엘리스 세볼드의 동명 베스트셀러가 원작이라는 점, 둘째로 이 소설의 주요 배경이 현실과 천국 사이의 경계라는 점, 셋째는 화자가 14세 소녀라는 점이다.

많은 독자를 거느린 베스트셀러의 영화화는 소위 '양날의 칼'이지만, 피터 잭슨은 이 칼을 다루는 데 선수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성공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성공적)으로 영화로 옮긴 것이 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는 원작 소설의 독자가 보길 원했던 이미지와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도 쉽게 따라올 이야기와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의 황금비율을 알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주요 공간인 판타지의 세계도 피터 잭슨에겐 안방처럼 익숙한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영화가 '대중적인 안락함'을 획득하기 직전의 <천상의 피조물>(94)과 비슷한 요소가 많다. 14세 소녀들이 주인공으로, 현실과 판타지가 교차하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충격적 결말이 밝혀지고, 범죄를 소재로 하지만 형식적으론 '범죄영화'가 아니다. <킹콩>(05)에서 확인시킨 엔터테인먼트 감각도 훌륭하지만, 천진한 열망이 잉태시킨 비극을 잡아챈 <천상의 피조물>의 세밀한 감성은 아찔하다. 이런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자의식 과잉이 낳은 빈약한 실패작"이라는 거친 평가에 휩싸여 있다. 정말 그럴까?

"내 이름은 수지 샐먼, 물고기 이름과 같다"고 귀엽게 투덜거리는 소녀(시얼샤 로넌)은 여느 14세 소녀와 다를 바 없는 "밝고 행복한" 아이였다. "아무 일 없이 나쁜 일이 생기는 운 없는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소녀는 아무런 이유 없이, 굳이 이유를 찾자면 너무 "사랑스럽다"는 이유로 이웃집 살인자 하비(스탠리 투치)에게 살해당했다. 이건 스포일러가 아니다. "14살, 나는 살해당했다"는 내용은 <러블리 본즈>의 메인 카피이기도 하다.

영화는 수지의 독백으로 이미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사실과 범인의 정체를 모두 밝히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린 딸을 황망히 잃은 가족들은 절망하고, 이웃집 살인마는 잡히지 않고, 죽은 수지는 현실과 천국의 경계에서 헤매며 이들을 바라본다. 관찰한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수지는 여전히 안타깝고, 두렵고, 억울하다. 그녀는 현실에 개입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종종 가족에게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그건 남아 있는 가족의 슬픈 환상이라 해도 무방하다.

피터 잭슨 감독에게 쏟아진 '실망'은 그가 '현실과 천국의 경계'를 보여주는 일에만 정신을 팔았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수지가 살해당한 후, 영화는 그녀가 헤매는 경계 공간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그 곳은 비극적인 현실과 완벽히 대조를 이루는, 동시에 열네 살 소녀가 '천국으로 가는 길'로 상상했음직한 아름다운 판타지의 세계다. 하지만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현실과 이어진 '문' 앞, 헤매는 영혼을 위해 서 있는 듯 보이는 등대 앞은 음습하고, 아빠(마크 월버그)가 딸과 함께 만들었던 병 속의 배를 부술 때 수지의 눈앞에서 거대한 배들이 좌초되는 바닷가는 슬프다. 현실과 반드시 교차되도록 배치한 판타지 신들은 그저 '누구나 상상했던, 하지만 누구도 본 적 없는 천국으로 가는 길'을 창조하고 싶었던 감독의 '자의식 과잉'이라기보다는, "수지는 죽었지만, 사라진 건 아니다"라고 계속 확인시켜주려는 감독의 애정표현으로 보인다.

혹자는 영화가 판타지를 구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원작 소설이 집중했던 남은 자들의 고통과 치유의 과정을 성기게 그렸다고 질책한다. 하지만 영화 <러블리 본즈>가 화자인 수지를 '관찰자'가 아닌 남은 사람들 못지 않게, 아니 남은 사람들 누구보다 괴로운 '피해 주체'임을 드러내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남은 가족의 이야기를 덜어낸 각색을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의 분량은 줄어들었지만, 고통의 무게는 줄지 않았다. 피터 잭슨 감독은 흘깃 쳐다보는 화면 속에 남은 자들의 지옥을 담는다. 수지가 찍은 필름을 "한 달에 한 통만 인화하기로 약속했으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우기는 아빠나 수지가 죽은 후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이가 둘 뿐"이라고 말한다는 엄마(레이첼 와이즈)나 언니의 강간살해 사건 이후 푸시업과 조깅으로 몸을 단련하는 여동생 린지(로즈 맥클버)의 모습은 '지옥 같은 현실'을 버텨야 하는 사람들의 일상이다.

이런 옹호를 긍정한다고 해도 <러블리 본즈>는 관객을 허망하게 만든다. 수지는 경계에서 갈팡질팡할 뿐이고, 아빠는 직감적으로 범인의 정체를 눈치 채지만 잡지 못하고, 여동생 린지가 목숨을 걸고 결정적인 증거를 찾은 뒤에도 이웃집 살인자는 유유히 법망을 피해간다. 관객은 무력하게 수지의 육신이 늪 속으로 수몰되는 순간을 지켜봐야만 한다. 피터 잭슨은 무언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처럼 마음을 졸이게 만드는 영화적 장치를 한껏 구사해 놓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관객의 입장에선 김이 빠지고 울화가 치민다.

"왜 수지의 한을 풀어주지 않는가!"라는 감정적 불만은 "왜 수지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가!"라는 영화 구조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진다. 만약 하늘의 수지가 가족에게 살인범의 정체를 제보하고, 가족이 그 사인을 알아듣고 결국 그를 응징하는 이야기로 각색했다면, <러블리 본즈>는 훨씬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사실 예고편을 본 관객들은 이 흥미진진한 과정을 기대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못했다'기 보다 '안했다'는 인상이 강하다.

우리는 그간 피터 잭슨의 영화에선 현실계와 가상계가 이어짐으로써 발생하는 스펙터클을 즐겨왔다. 외계인이 지구마을을 습격하고(고무인간의 최후), 괴물 원숭이가 인간을 물고(데드 얼라이브), 소녀들의 상상이 살인으로 이어지고(천상의 피조물), 악령이 연쇄살인을 일으켰다(프라이트너).

인간과 호빗, 요정이 한 팀으로 이룬 모험담(반지의 제왕)과 밀림에서 잡혀와 뉴욕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괴수의 러브스토리(킹콩)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러블리 본즈>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천상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회복시키는 데, 아무런 힘을 미치지 못한다. 잭슨의 영화 중 유일하게 현실과 판타지의 세계가 단절되어 있다. <러블리 본즈>가 고집한 두 세계의 단절과 단절이 낳은 무기력은 피터 잭슨의 의도처럼 보인다.

판타지의 세계에서 영화의 동력을 빌려 오던 그가 판타지의 무력함을 깨달았다는 건 섣부른 오독일 듯. 하지만 판타지의 개입 없이도 완전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인상적인 현실 신이나, 수지와 가족들이 각자의 "완전한 세계에 살"면서 그 세계 속에서 고통을 이기는 결말에선, '판타지의 제왕'의 변화가 엿보인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에서 판타지의 동력을 떼는 실험을 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러블리 본즈>가 "과용의 실패작"이라는 평가는 가혹하다. '각성을 위한 숨 고르기'라면 모를까.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