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 <크리미널 마인드> 등 다양한 범죄심리분석가 그려

영화 '양들의 침묵'
끝나도 끝나지 않은 사건이 있다. 이른바 '김길태 사건'이 그렇다.

피의자 김길태는 또 한 번 '사이코패스'를 검색어 순위에 올려놓았다. 네티즌들은 피해자 이양에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자책과 함께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낸다.

이 와중에 등장한 '김길태 팬카페'는 온 국민을 경악시키며 운영자가 검거되는 촌극을 빚어내기도 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두통을 일으키는 이 사건에서 그나마 의미 있었던 성과는 프로파일러(profiler·범죄심리분석가)의 역할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특히 이번 피의자의 자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경찰청 과학수사센터의 권일용 경위는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의 강호순, 정남규와 안양 초등학생 살해사건의 정성현의 자백에 기여하기도 해서 최근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 '88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피의자들에게 과학적인 분석법을 적용해 결국 범죄를 실토하게 만드는 프로파일러의 치밀한 심리전은 그 자체로 극적이다. 그래서 해외에서는 스릴러물이나 추리˙수사물의 단골 소재가 된 지 꽤 됐지만, 국내에서는 최근 일련의 연쇄살인사건으로만 간간이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다.

피의자의 작은 버릇이나 성격, 말투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 프로파일러들의 날카로운 눈썰미는 오래 전부터 추리 소설의 탐정 캐릭터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어 왔다. 그중 가장 유명한 캐릭터는 역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다.

그는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의 옷이나 신체적 특징, 특정한 행동만으로 그 사람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정확하게 해내 독자를 감탄시킨다. 하지만 거의 본능적으로 구사되는 이런 능력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괴팍한 인물로 그려지기도 했다.

국내에서 대중에게 프로파일러의 존재를 처음 알렸던 것은 영화 <양들의 침묵>(1991)이었다. 여기에는 의미 있는 세 명의 프로파일러가 등장하는데,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 스탈링(조디 포스터 분), 살인마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 분), 그리고 스탈링의 상관인 잭 크로포드(스콧 글렌 분)다.

<양들의 침묵>의 프로파일러라고 하면 대개 스탈링만 떠오르지만, 영화에서 최강의 프로파일러는 그가 아닌 한니발 렉터였다. 특수감옥의 강화유리막을 사이에 두고 스탈링을 거꾸로 프로파일링하는 렉터 박사의 오싹한 카리스마는 안소니 홉킨스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영화 '마인드 헌터'
이 영화에서 눈여겨 봐야 할 또 하나의 프로파일러는 잭 크로포드다. 비록 극 전개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가 모델로 한 사람은 실제로 최초의 프로파일러였던 FBI 요원 존 더글러스였다. 그는 찰스 맨슨과 같은 희대의 연쇄 살인범을 인터뷰하며 연구한 자료를 바탕으로 은퇴 후 <마인드 헌터>, <어둠 속으로의 여정>과 같은 베스트셀러를 발표하기도 했다.

<양들의 침묵>이 매력적인 캐릭터로서 프로파일러의 가능성을 발견한 영화였다면, 이후 등장한 영화들은 그 직업을 전면에 내세워 극 전개의 중심에 놓았다. <키스 더 걸>(1997)은 아예 미모의 여성들만을 납치하는 범인과 프로파일러의 대결을 다뤘다. 정신과 의사 겸 프로파일러인 주인공(모건 프리먼 분)은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발견해 범인에게 다가가며 스릴러로서의 묘미를 십분 살린다.

<본 콜렉터>(2000)에서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프로파일러와 행동파 경찰이 콤비를 이뤄 사건을 해결한다는 콘셉트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여기서 프로파일러의 도움을 받는 경찰 역으로 등장했던 안젤리나 졸리는 <테이킹 라이브즈>(2004)에서는 직접 프로파일러로 출연해 연쇄살인범과 대결을 벌인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프로파일러 캐릭터를 좀 더 색다르게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서스펜스 틀과 결합시키는 시도도 있었다. <마인드 헌터>(2004)는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프로파일러를 밀어넣은 듯한 설정으로 이목을 끌었다.

살인자의 덫에 걸린 프로파일러들은 동료들이 하나둘씩 죽어가자 평정심을 잃고 자멸하고 만다. 프로파일러 범죄자라는 내부의 적과 싸우는 주인공의 치밀한 프로파일링이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한다.

드라마 '혼'
<88분>(2007)은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프로파일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자신이 붙잡은 범죄자로부터 "88분 안에 죽게 될 것"이라는 죽음의 예고를 받은 베테랑 프로파일러는 그 목소리와 심리적 태도에서 후보군을 좁히고 결국 협박범을 찾아낸다. <마인드 헌터>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파일러를 위기에 몰아넣고 냉정하게 대처하게 함으로써 상황을 역전시키는 묘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프로파일러를 다룬 작품의 '본좌'는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다. 국내에서 벌써 시즌5를 방영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미 연방수사국(FBI) 행동분석팀(BAU, Behavioral Analysis Unit) 소속의 프로파일러들의 활약상을 다룬다. 냉철한 판단력의 팀 리더와 강박성 범죄 전문 행동대장, 미디어 담당 특수요원 등 특화된 역량을 하나로 모아 사건을 해결하는 프로파일러들의 모습은 국내에도 또 하나의 전문직 드라마의 탄생을 예감케 한다.

반면 국내에서 프로파일러를 다룬 작품은 아직 손에 꼽을 정도다. 최초로 프로파일러를 소재로 했던 영화 <가면>(2007)에서 김민선이 프로파일링을 하는 형사로 분했지만, 지나친 반전의 반복으로 캐릭터의 재미를 살리는 데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아이리스> 역시 '미녀 프로파일러 요원'이라는 설정 이외에는 프로파일러로서의 전문성은 전혀 보여주지 못해 캐릭터 낭비에 그치고 말았다.

현재 국내에 40여 명밖에 활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본격적인 프로파일러 작품의 등장은 요원한 상황이다. 그래도 이번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세상의 관심을 받고 있는 프로파일러들의 고충은 그 자체로 좋은 이야기가 된다.

권일용 경위는 늘 악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하는 프로파일러의 고충을 토로한 바 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프로파일러가 자기 안에 선악의 경계를 공고하게 세워놓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이중의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악을 처단하려다 자신이 악이 됐던 프로파일러를 다뤘던 드라마 <혼>(2009)은 이런 프로파일러의 현실을 엿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