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후 상처받은 여심 울려슬픔·종말의 감정 통해 새 희망 품게 하는 미덕 발휘[우리시대의 명반·명곡] 백설희 1953년 '봄날은 간다' (유니버샬 레코드)

추운 겨울 내내 움츠렸던 어깨가 쫙 펴지는 봄이다. 새 학기, 새 출발, 희망, 생명 같은 긍정적인 단어가 떠오르는 봄은 모두에게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희망찬 계절이다.

여심은 춘심이라 했다. 여성들의 원색적인 패션에서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온다. 만물이 소생하고 모두에게 활기찬 기운을 안겨주는 계절의 여왕인 봄을 소재로 한 대중가요는 무수하다.

시즌 송은 계절마다 나름의 특징이 있다. 태양의 계절인 여름 노래는 더위를 시켜주는 시원하고 경쾌한 댄스풍의 멜로디와 뜨겁고 열정적인 사랑 노래가 많고, 가을 노래는 사색적이면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애틋함과 이별의 쓸쓸한 정조가 감도는 분위기가 대세다.

오랫동안 봄노래의 전형은 축축 처지는 멜로디가 아닌 발랄하고 재미난 리듬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최근 발표된 이소라의 '봄'이나 자우림 리드보컬 김윤아의 여러 봄노래를 들어보면 내밀한 개인적 감성을 드러낸 슬프고 비장한 느낌으로 변화되는 추세에 있다.

설렘의 계절 봄. 누구에게나 청춘의 봄은 있었지 않았는가. 오랜 기간 사랑받는 영원한 봄노래의 고전으로 상큼한 느낌의 박인희의 '봄이 오는 길', 트로트 리듬이 귀에 감겨오는 이정선의 '봄', 봄 결혼시즌을 대표하는 한상일의 '웨딩드레스', 외국번안곡인 장미화의 '봄이 오면', 그리고 봄을 맞아 새로운 출발을 한 분들에게 제격인 김용만의 '청춘의 꿈'이 있다. 바나나걸의 '꽃'과 재주소년의 '봄의 사진'도 봄에 제격인 요즘 노래다.

화사한 꽃향기가 진동하는 봄은 시심을 자극하는 계절이다. 사실 이해되지 않는 난해한 현대시보다 가슴 속에 들어와 가슴을 베어가는 대중가요 노랫말이 더 시가 될 때도 있다. 얼마 전 계간시인세계에서 현역시인 100명에게 <시인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을 조사해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었다. 당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1위에 오른 노래는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였다.

1943년 데뷔한 백설희(본명 김희숙)는 이 노래 외에도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목장 아가씨' '물새 우는 강 언덕'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가수다. 그녀의 가정은 대중문화의 명가로 손색이 없다. 인상적인 연기력으로 50-60년대를 풍미했던 작고한 배우 황해는 그의 남편이고 70-8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가수 전영록은 그의 아들이고 손녀 전보람도 현재 걸 그룹 '티아라'의 멤버로 활약하고 있다.

사실 이 노래는 사실 화사한 봄날에 어울리는 봄노래의 전형에서 빗겨난 슬픔과 퇴폐와 절망이 뒤엉킨 구슬픈 노래다. 하지만 이 노래만큼 한국 여인들의 한스런 마음을 잘 표현한 노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슬퍼서 더욱 아름다운 노래다.

실제로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한국전쟁 후 상처받은 많은 여심을 울렸던 이 노래는 손로원이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해 1953년 대구에서 유니버샬 레코드를 통해 유성기음반으로 발표되었다. 박시춘은 히트곡만 300곡이 넘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최고의 작곡가이고 손로원은 일제 치하에서는 한 줄의 가사도 쓰지 않다 해방과 함께 왕성한 활동을 재개한 작사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계절 봄날에 더욱 빛을 발하는 이 노래는 누구나 공감하는 한의 정조로 가득하다. 그래서인가 오리지널 가수 백설희 이후 금사향, 이미자, 배호, 조용필, 나훈아, 은방울자매, 하춘화, 문주란, 최헌, 이은하, 금과은, 심수봉, 김도향, 이동원, 장사익, 한영애, 홍서범 등 우리시대의 최고의 가인들이 이 노래 리메이크 작업에 참여했다. 허진호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연극으로까지 만들어진 이 노래는 아코디언의 거장 심성락, 신예 가야금연주가 정민아 등 연주인들 또한 가장 선호하는 불후의 명곡이다.

알뜰한 맹세가 실없는 기약이 되고 끝내 얄궂은 노래가 되듯 봄날의 끝자락에 발표된 이 노래는 슬픔과 종말의 감정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는 미덕을 발휘한다. 이 노래가 세월을 넘어 변함없이 봄날에 불리어지는 이유다. 다만 낭랑한 목소리를 자랑했던 백설희는 현재 고혈압에 따른 합병증으로 투병 중이라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