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슈퍼맘', '알파맘' 아닌 '사랑스런 계모' 지배하지 않는 권력의 힘을 증명

고부갈등 대신 '장서갈등(丈壻·장모와 사위)'의 시대가 왔다느니, 가모장이 가부장을 대체했다느니, 집안 모임이 처가 위주로 변화해 간다느니 하는 수상한(?) 소식들이 들린다.

바야흐로 '신모계사회'의 징후들이다. 여성의 경제적 파워와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몰락한 가부장제도의 빈 자리를 알파맘 혹은 수퍼맘이 대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빈 자리, 혹은 모자란 자리를 어머니가 전적으로 대신하는 것이 신모계사회라면 그 '새로움'은 단지 권력의 책임 소재가 '부'에서 '모'로 바뀐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게다가 장성한 자녀의 주변을 24시간 맴돌면서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헬리콥터맘'이 신모계사회의 바람직한 롤 모델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지 않을까. 알파맘이든 헬리콤터맘이든 캥거루족을 양산하기는 마찬가지니 말이다.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우리는 '모성'이라는 전지전능한 리모콘으로 가족들을 통제하는 화려한 수퍼맘이 아니라, 계모라는 핸디캡을 딛고 매번 좌충우돌하며 좀 더 멋진 엄마가 되기를 꿈꾸는 한 여자의 아름다운 투쟁을 목격한다.

요리연구가 김민재(김해숙)는 첫 번째 결혼으로 낳은 딸 지혜(우희진)의 '양씨 성'을 바꾸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로 남편 양병태(김영철)와 결혼했다는 우스갯소리를 해가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민재는 재혼 이후 호섭과 초롱을 낳아 무려 4남매의 엄마가 되었지만, 그녀의 아킬레스건은 병태의 '전처소생'인 태섭(송창의)이다.

태섭은 민재가 계모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6살 때부터 쭉 자신을 친아들처럼 키운 새엄마에게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다. 아무리 '닳고닳은 엄마'가 되어도 태섭에겐 늘 '새엄마'일 뿐이었던 것이다. 노총각 시동생 둘과 시부모님, 사위와 손녀까지 무려 12명의 대가족살림을 책임지는 민재는 큰아들의 '예절 바른 냉대'에 매번 상처받으면서도 변함없이 일방적인 애정공세를 퍼붓는다.

가족을 향한 그녀의 절대적 영향력이 증명되는 것은 온가족의 평화를 위협하는 위기가 닥쳤을 때다. 큰아들 태섭이 동성애자였다는 것을 삼십여 년 동안 전혀 몰랐던 가족들.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 채영을 뿌리치고 동성 애인 경수를 힘겹게 선택한 태섭은 더 이상 이 사실을 숨길 수 없다고 느낀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가족의 갈등요인인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이 치명적인 비밀을 '공유'해 나가는 '과정'이다. 태섭은 앙큼하게도 친아버지가 아니라 계모인 민재에게 이 사실을 가장 먼저 고백한다. 이유는 '어머니가 이 가족의 실권자이시니까', 그리고 새어머니를 '친아버지'라는 거대한 장벽을 통과하기 위한 일종의 메신저이자 완충장치로 활용하고자 하는 주도면밀한 계산 때문이다.

민재의 '계모'라는 제3자적 위치를 태섭은 십분 활용하고자 한다.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직접 토해낼 수 없는 비밀을, 어머니가 '대신' 처리해주길 바란 것이다. 태섭은 드디어 새어머니 앞에서 자신이 여자가 아닌 남자를 사랑한다고, 이 비밀이 너무 고통스러워 여러 번 죽고 싶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민재는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통곡을 참지 못한다. 혹시 나 때문이냐고, 내가 너를 외롭게 해서 네가 그렇게 된 것이냐고 묻는 새어머니. 놀라서 미안하다고,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새어머니의 감당할 수 없는 사랑 앞에서 태섭은 숙연해진다. 생모도 아니면서 어인 눈물바람이냐는 눈빛으로 민재를 바라보는 태섭의 시선은 점점 '의아함'에서 '뉘우침'으로 바뀌어간다.

항상 자신만이 이 가족의 아웃사이더라 믿어온 태섭은 '생모 vs 계모'라는 잣대로 민재를 판단해 온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태섭의 예상은 기대 이상으로 적중하여,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아버지는 태섭을 무조건 끌어안아주고 가족들 또한 군말 없이 민재의 '진두지휘'를 따르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늘 떠들썩하지만 기묘한 안정감으로 유지되는 이 '엄마-아내-며느리' 중심의 평화. 이 모계적 평화가 가부장적 평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아무도 어머니를 진심으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능력에 압도되거나 아버지의 엄격함에 짓눌린 가부장 중심의 중앙집권제가 아니라, 어머니의 열정적인 오지랖이 집안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어서 도저히 어머니의 사랑을 피해 숨을 곳이 없는, 어머니의 '권력'이 아닌 '구애'로 유지되는 평화. 안정된 '지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 '관계'를 지향하는 민재의 사랑. 그 예측불허의 열정으로 촘촘히 직조된 엄마표 사랑의 그물을 가족들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다.

아버지의 권력이라는 창살로 가족들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그물로 가족들을 끌어안는 사랑. 어머니가 무섭거나 유능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끝없이 용솟음치는 사랑의 한계를 도저히 알 수 없어 가족들은 감히 그녀에게 대들지 못한다. 이 가족은 '부전자전'보다는 '모전녀전'의 전통에 충실하다.

'아들의 동성애를 조건 없이 허하라'는 엄마의 교지를 이어받아 그 딸 지혜도 '꼴통보수' 남편의 고집을 기어이 꺾어놓는다. 태섭의 동성애를 인정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지혜는 단단히 못을 박는다. 우리 엄마 뜻에 따르지 않을 거면, 당신 침대 위에 평생 '사랑'은 없다고. 이 끔찍하고도 귀여운 협박에 안 넘어갈 수 있는 남편이 몇 명이나 될까.

남편의 월급봉투 때문에, 남편의 무서운 눈초리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만 더 멋진 엄마가 되기 위해 날마다 불완전한 자신의 사랑의 나무에 이해의 물과 용서의 비료를 주는 '철없는 계모'의 사랑. 후처니 재취니 하는 전근대적 용어를 써가며 형수님의 '사랑의 마수'에서 벗어나려는 시동생 병걸(윤다훈)의 보이콧 자체가 민재의 '지배하지 않는 권력'의 힘을 증명한다.

형수님이 그토록 파워풀하지 않았다면 저런 '힘없는 이단아'도 생기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아무리 거부해도 지울 수 없는 그 강력한 사랑의 거미줄 앞에 가족들은 자신도 모르게 사로잡힌다.

이에 비해 태섭의 연인 경수의 어머니(김영란)는 아들이 '게이'라는 것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어 그를 '괴물'이라 지칭한다. 경수의 생모는 태섭의 계모보다 훨씬 치열하게 아들을 자기 입맛대로 요리하려 한다. 경수의 어머니가 가문의 품격을 위해 게이인 아들의 성정체성을 기어이 박탈하려는 것과 달리, 태섭의 계모는 처음부터 아들과 자신 사이에 놓인 지울 수 없는 거리를 긍정한다.

아들을 내 것으로 소유하는 것보다는 아들을 '타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사랑이라는 것을 민재는 안다. 무엇보다 보기 좋은 건 민재가 그토록 험난한 산전수전 공중전을 치러왔으면서도 살면 살수록 더더욱 밝고 활기차 보인다는 것이다. 찌들어 보이지도 짓눌려 보이지도 애써 괜찮은 척 센 척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이 오지랖 넓은 계모의 매력포인트다.

그녀의 내부에서 언제나 무한리필되는 사랑의 힘은 그녀를 더 젊고 더 활기차 보이게 만든다.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보다는 '내가 남들을 어떻게 바라볼까'를 고민하는 새엄마, 내 아들딸을 '내 것'이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머나먼 타인'으로 바라볼 줄 아는 계모.

알파맘이나 수퍼맘이라서가 아니라, 아버지보다 유명하고 아버지보다 벌이가 괜찮은 셀러브리티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날 문득 '살면 살수록 당신이 더 좋아'라고 속삭이며 남편을 끌어안는 이 여자의 사랑이 너무 따스해서, 우리는 그녀의 가슴팍에 기꺼이 안기고 싶다. 신모계사회의 진정한 롤모델이란 수퍼맘이나 알파맘이 아니라 바로 이런 '사랑스런 계모'가 아닐까.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