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미하일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완벽하게 재단된 흑백화면과 서슬 퍼런 침묵으로 악의 기원을 좇아

미하일 하네케 감독의 영화를 보는 건, 꽤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마치 정수리를 도끼로 쿡 찍은 뒤, 살갗이 툭 찢어져 그 사이로 시뻘건 피가 차오르고, 핏줄기가 몸을 구석구석 훑은 뒤, 바닥에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과정을 꼼짝없이 지켜봐야 하는 심정이다.

눈을 질끈 감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건 하네케의 영화가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문제적 감독'이라는 별명을 안긴 <퍼니 게임>이나 <피아니스트>는 잔혹과 매혹이 뒤섞인 하네케 표 영화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흰 옷을 입고 입에 그려 넣은 것 같은 미소를 띈 청년이 '아무 이유 없이' 한 가족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퍼니 게임>과 겉으로는 고상하고 완벽한 여인의 내면에 일렁이는, 자기 파괴적 에로스의 열망을 파격적으로 묘사한 <피아니스트>로 하네케 감독을 접한 관객이라면 <하얀 리본>이 조금 어리둥절할 지도 모른다.

<하얀 리본>은 <퍼니 게임>의 잔혹과 <피아니스트>의 매혹에서 한 발쯤 떨어져있는 영화다. 인물의 코앞에 카메라를 들이밀어 놓고 관객을 파격의 현장으로 밀어넣던 과거의 작품과 달리 <하얀 리본>은 저 멀리에 카메라를 세워두고 과거 독일의 한 작은 마을로 관객을 조용히 불러들인다.

영화는 1913년 독일의 한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에서 시작한다. 사건을 지켜보고 관객에게 전달하는 화자는 마을에 새로 부임한 젊은 교사(크리스티안 프리에델).

첫 번째 사건은 장난처럼 벌어진다. 마을 의사가 누군가가 설치한 덫에 걸려 낙마하는 사고가 생긴 것이다. 분명 의사의 동선을 잘 아는 누군가가 의사가 말을 타고 다니는 길목에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얇은 줄을 걸어 놓았다. 이 장난 같은 테러가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점점 큰 사건이 벌어진다.

증오 범죄인 게 분명한 폭행과 고문, 방화와 살인까지. 교사는 이 사건의 범인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점차 이 사건들이 마을의 비밀과 연관되어 있음을 눈치챈다.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의 껍질이 툭 찢어지는 순간, 피가 맺힌다. 미하일 하네케 감독이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순간이 아닌가.

표면적으로는 범죄 사건의 범인을 좇는 스릴러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하얀 리본>은 일반적인 '탐정극'이 아니다. 하네케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건 따로 있다. 보통의 범죄영화라면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사건'에 방점을 찍겠지만, 하네케 감독은 사건의 요람이 되는 '이상한 마을'에 방점을 찍는다. 신참 교사가 범인을 찾는다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동안, 감독은 무심하게 마을 사람들의 치부를 하나씩 벗겨낸다.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다던 귀족은 돈에 눈먼 수전노였고, 신의 말씀으로 구원을 논하던 목사는 교육을 핑계로 아이들을 학대해 왔으며, 사람 좋아 보이던 마을 의사는 어린 딸에게 성적 쾌락을 얻는 짐승이다. 한 평생을 좁은 마을에서 부대끼며 살아 온 그들이 서로의 본색을 모를 리 없다. 다만 통제하고, 숨기고, 함구할 뿐이다.

마을을 떠도는 불편하고 음험한 공기 속에서 감독은 창백한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면, 당연히 피해자는 아이들이다. 마을 어른이 강요하는 순종과 순결을 따른다는 약조로 아이들은 머리카락과 어깨에 하얀 리본을 매야만 한다.

사춘기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성욕도 죄악시하는 과도한 순결주의의 상징이다. 물리적으로 어른들을 당해낼 수 없는 아이들이 하얀 리본을 맨 채, (무표정에 가까운) 무기력한 얼굴을 보여줄 때, 우리는 당연히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은 옅어진다.

특히 아이들이 '희생양'이라는 인식은 도발적인 재질문을 받는다. 하굣길 뜀박질이 빠른 사내아이들이 달려 나가며 "꼴찌는 바보"놀이를 하자, 작고 걸음이 느린 아이들은 나란히 발을 맞춰 걷는다. 아이들의 어깨와 머리카락에 묶인 하얀 리본과 발맞춤이 문득 소름끼치는 이유는 우리가 영화 이후에 벌어진 '이 아이들의 역사'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하얀 리본은 나치 완장이 되고, 발맞춤은 파시즘으로, 집단 테러는 홀로코스트로 증식된다. 애당초 하네케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건, 이 싹이다.

<하얀 리본>을 보고 나면, 이 우아한 흑백영화가 결국 그의 문제적 전작들과 한 핏줄 영화임을 알 수 있다. 미하일 하네케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하나다. 바로 경고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거칠게 뭉뚱그려 '광기' 혹은 '악함'이라고 표현하는 그것이 나, 너, 우리의 안에 이글거리고 있음을 제발 잊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것은 통제로 가두어지지 않고, 함구로 묻히지 않으며, 망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하얀 리본>이 잊을 수 없는 두려움을 남기는 까닭은, 문득 껍질을 찢고 나온 악함이 서서히 증식하고, 결국 사회와 역사를 송두리째 삼키는 과정을 우리가 무던히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다시 영화의 사건으로 돌아가자면, <하얀 리본>의 범죄들은 끝까지 누가 범인인지 밝혀지지 않는다. 심증이 가지만, 누구도 그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다. 하네케 감독은 관객의 속을 답답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끝까지 범인을 숨기는 게 아니다. 그에게 개인의 이유, 즉 한 범인의 사적인 범죄동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악함이 항시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 범인이 '나'일수도, '너'일수도, '우리'일 수도 있다는 것. <하얀 리본>의 소름끼치게 차가운 경고에 62회 칸국제영화제는 황금종려상을 안기며 고개를 끄덕인 바 있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