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형제들>, <순위 정하는 여자> 성별 내세운 프로그램 인기

'뜨거운 형제들'
일요일 주말 저녁, 리모콘 버튼 하나로 정 반대의 세계가 펼쳐진다. 한 쪽에서는 여자 6명이 나와 시집을 가야 한다며 단체로 스파를 찾아 서로 얼굴에 머드팩을 발라준다.

채널을 돌리면 남자 6명이 엄동설한에 꽝꽝 얼어붙은 개천을 두드려 부수고 차례차례 입수한다. 크게 웃고 괴성을 지르는 가운데 다시 채널을 돌리면 '꺄르륵~ 종알종알' 쉴 새 없이 조잘대던 여자들은 급기야 울기도 한다. TV 속의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에 대하여.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최근 리얼리티 오락프로그램의 키워드는 성별이다. 제목에 아예 남자와 여자를 드러낸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남자의 자격>, <여자 만세>, <뜨거운 형제들>, <순위 정하는 여자>, <골드미스가 간다> 등 출연자들이 남녀로 명확히 구분된 프로그램은 가장 최근에 제작된 여성 버라이어티 <영웅호걸>을 포함해 11개에 이른다.

이중 상당수는 동 시간대 시청률 1위의 인기 프로그램이거나 최근 가장 떠오르는 프로그램, 아니면 신규 프로그램이다. '젠더'는 지금 예능 프로 제작자들이 고려해야 할 첫 번째 키워드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는 어쩌다 헤어지게 됐을까?

'남자의 자격'
"이전에는 남녀가 같이 어울려 퀴즈를 풀거나 게임을 하는 것으로 재미를 줬다면 이제는 유행이 바뀐 거죠. 시청자들이 기존 포맷에 질리니 새롭게 찾아낸 재미 요소가 성별이라고 생각합니다."

<팝콘 심리학>의 저자이자 심리학 박사인 장근영 씨는 성별 프로그램의 부흥을 예능의 분화, 발전이라고 분석했다. 남녀가 같이 노는 기존 포맷도 그대로 유지하되 새로운 영역이 생겨났다는 것.

"보통 이성을 대할 때와 동성을 대할 때 행동의 룰이 달라지잖아요? 이성을 대할 때의 행동 양식에 더 이상 볼거리가 없으니까 동성끼리 모였을 때 나오는 이야기들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거죠."

이성과 있을 때 생산될 수 있는 매력의 결정판은 가상 결혼 버라이어티 <우리 결혼했어요>였다. 각종 짝짓기 프로그램에서 감히 하지 못했던 스킨십, 애교, 배려, 다툼, 화해, 성숙 등 다채로운 요소들이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귀엽고 로맨틱한 신랑, 서툴지만 열심히 요리하는 새 신부의 모습은 댄스 타임을 통한 매력 발산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입체적인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달콤한 사랑 싸움도 회를 반복하면서 단물이 거의 빠져 나갔고, 제작진이 시청률 하강을 막기 위해 급하게 투입한 어린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로 인해 리얼리티와 생동감은 땅에 떨어졌다.

'순위 정하는 여자'
그들이 어색하게 또는 억지로 애정을 표현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머리 아픈 연애사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영혼들이 색다른 매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여자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불편하게 얼어 있다가 'xx친구'를 만나 봇물이 터지기 시작한 남자처럼 거침 없고, 편안하고, 거리낌 없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남자들만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의 시초는 <무한도전>이지만 본격적으로 남성 호르몬을 분출하는 프로그램은 <1박2일>이 처음이다. 자칭 '대한민국 남성의 상징' 강호동을 중심으로 엄격한 서열, 폭력이 섞인 거친 장난, 쓸데 없는 데 목숨 걸기 등 남자들만의 세계가 전국을 배경으로 펼쳐졌다. 말 한번 잘못하면 '조인트를 까이고', 얼음물만 보면 알아서 차례로 뛰어 들어간다. 거의 매회 모든 멤버들이 초주검이 되고 나서야 촬영이 끝난다.

최근 가장 뜨거운 버라이어티 <뜨거운 형제들>에서 박명수, 탁재훈, 사이먼 디 등으로 이루어진 남자 출연자들은 마치 여자 앞에서 장난기를 주체 못하는 남자 고등학생 같다. 그들은 친구가 여자 앞에서 망신당하는 꼴을 보며 배를 잡고 웃고, 매너 있게 행동하는 멤버를 팔불출이라고 질시하며, 아바타를 통해 버럭 화를 내거나 똥 이야기를 해 여자들을 놀래키고 즐거워한다.

동성끼리 있을 때에만 나올 수 있는 '찌질함'이 창고 개방하듯 열렸다. 여자가 없기에 존재 가능한 세계다. 여자의 타박 한 마디면 아무리 몸을 부풀리고 있는 수컷 대장이라도 단번에 기가 꺾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성 호르몬 제대로 발산하는 이 폭탄 수컷들은 희한하게도 알렉스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젠더라는 화끈한 콘텐츠

자유롭긴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잘 하지도 못하는 액션은 집어치우고 본격적으로 남자 얘기, 망가지는 몸매에 대한 걱정, 재테크, 가십, 결혼생활, 출산, 남편 흉보기 등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수직적 관계보다는 수평적 구도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거친 장난 대신 속 얘기를 털어 놓으면서 친해지는 여자들의 전형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건강을 주제로 할 때는 가슴 사이즈 측정은 기본이고 섹스를 빗대는 수위 높은 이야기가 오고가기도 한다. 남자가 끼어 있다면 크게 문제가 되었을 성(性) 이야기가 비로소 성희롱의 위험을 벗어나 자유로워졌다.

최근 케이블 TV에서 방영 중인 <순위 정하는 여자>는 현영과 김새롬, 이지혜 등 소위 드센 여자들 10인의 토크쇼다. '19금 과외를 잘해줄 것 같은 여자', '내 애인을 소개시켜 주면 빼앗아갈 것 같은 여자'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애인과 3시간 동안 키스한 일, 비키니 제모 등 폭탄 발언이 쏟아졌다.

드레스를 차려 입은 여자 출연자들은 예쁜 척하는 멤버에게 야유를 보내며 대놓고 견제하지만 한 명이 울기 시작하면 줄줄이 따라 우는 연약함을 보이기도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 감정과잉, 내숭, 은밀한 성욕 등등. 넘치는 에스트로겐 속에서 얼어붙지 않는 것만 해도 칭찬받아야 할 MC 이휘재는 여자들의 수다가 남자와의 대화가 되지 않도록 능수능란하게 거리를 둔다. <순위 정하는 여자>는 전 케이블 채널을 통틀어 25~44세 남녀 수도권 시청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이경실, 정선희, 김신영 등 여자 7명으로 시작된 <여자 만세>에서는 <남자의 자격> 여성 버전답게 중년 여성을 집중 조명한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여자로서 이루고 싶은 꿈'을 테마로 '자궁 나이 측정' 같은 과감한 주제를 논한다. 당연히 모든 멤버들이 가슴, 허리, 엉덩이 사이즈를 쟀고 이경실, 정선희 등 노련한(?) 멤버들에 의해 한바탕 야한 수다가 펼쳐졌다. <여자 만세>의 박범렬 PD는 여성 중심 프로그램이 잇따라 출현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여성의 이야기는 남성의 이야기보다 소재 선택과 표현에 있어서 훨씬 더 풍부하고 감성적일 수 있습니다. 감성이란 어떤 종류의 주제에서도 재미를 위해서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지요. 여성 중심 프로그램을 표방할 경우 여성 시청률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에 광고주들로부터 확실한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화성인과 금성인은 서로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지만 조금이나마 공통점을 발견하는 순간 서로의 매력이 증발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최근 등장한 초식남은 여자가 그토록 찾던 내면의 동반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여자들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과거의 마초를 그리워하는 부작용까지 낳고 있다. 경제력을 갖추고 연하의 남자와 연애하는 쿠거족 역시 술자리 농담으로는 이상형이 될 수 있지만 남자의 감각까지 일깨우지는 못한다. 지금 TV 속에서 폭발하고 소비되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인기를 끄는 이유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