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전당하듯 떠오른 악상에 담아[우리시대의 명반·명곡] 나훈아 '해변의 여인' (1971년 오아시스)나훈아 놓친 오아시스 맞불… 발표 2년 만에 다시 살아나 빅히트

차가 아무리 막혀도 여름휴가를 떠나는 여행길의 기분을 최고조로 올려줄 특급 병기는 신나는 노래일 것이다.

10대부터 70대까지 '피서지하면 생각나는 최고의 노래'를 물어 보면 세대 차이만큼 추천하는 노래가 제각각이다. 그만큼 세대마다 여름시즌의 분위기를 살려준 좋은 노래가 무수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혼성트리오 쿨과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은 여름 명곡 조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최상층에 선정되는 대표적인 여름노래다. 제목만 같고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이 노래들은 세대 차이와 더불어 세대를 뛰어넘는 대중의 공통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확인시켜준다.

'해변의 여인' 때문에 대선배인 나훈아와 본의 아니게 여름마다 경쟁구도를 형성한 쿨은 노래방 등록 노래숫자가 140여개에 달하는 인기그룹이다. 국민가수인 조용필, 이미자를 제치고 2위에 올라있을 정도. 지금은 쿨의 '해변의 여인'에 여름가요 최강자의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나훈아 역시 무려 153개로 이 부문에서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절대 지존이다.

가수 나훈아(본명 최홍기)는 '엘레지의 여왕'(이미자), '가왕'(조용필), '발라드의 황제'(이승철)와는 달리 특별한 애칭이 없다. 그냥 이름만으로도 카리스마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TV 출연을 거의 하지 않고 공연 무대 위주로 펼치는 그의 신비주의적인 활동 스타일은 카리스마 구축에 한 몫 단단히 했다.

그가 발표한 히트곡들은 대표곡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비롯해 '물레방아 도는데', '머나먼 고향', '고향역', '청춘을 돌려다오', '잡초', '영영', '무시로', '갈무리' 등 손에 꼽을 수 없다.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은 포항 출신 작곡가 박성규가 작사 작곡한 노래다. 1969년 작곡가로 성공하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그는 오아시스레코드의 전속 작곡가가 되었지만 월급조차 변변하게 받지 못하는 무명의 시절을 보냈다. 그해 여름 남이섬으로 떠난 회사 야유회에서 그는 귀가 준비를 하던 중 강 건너 높은 바위 위에 다소곳이 앉아 긴 머리를 휘날리는 여인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감전당하듯 순간적으로 악상이 떠오른 그는 그 느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오선지를 꺼내 들고 그림처럼 떠오른 악상을 정리했다. 그날 밤 서울로 돌아온 작곡가 박성규는 청계천 5가에 소재한 오아시스레코드 연습실에서 밤을 새워 노래작업에 몰두했다. 멜로디가 완성되자 남이섬에서 본 긴 머리가 휘날리던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사를 직접 붙여나갔다.

흥미로운 점은 처음 노래가 완성되었을 때 제목이 '해변의 여인'이 아닌 '호수의 여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나훈아가 취입을 할 때 오아시스레코드 측에서 "우리나라엔 호수보다는 해변 쪽에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해변을 배경으로 삼는 것이 히트할 가능성이 높다"며 노래제목 변경을 요구했던 것.

사실 이 노래는 빅히트가 터진 1971년보다 2년 앞선 1969년에 발표되었지만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된 곡이다. 지명도가 약한 신인 작곡가의 곡이었기에 다른 기성 작곡가들에 밀려 음반의 밑곡으로 수록되어 발표되었기 때문. 2년 만에 이 노래가 다시 살아나 대박이 난 이유는 이렇다.

1971년 최정상의 가수로 떠오른 나훈아는 지구레코드로 스카우트되었다. 대어를 놓친 오아시스에서는 맞불 작전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예전에 밑곡으로 깔아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나훈아 곡 중 '해변의 여인'을 찾아내 커버 곡으로 내밀어 발 빠르게 신보 음반을 발표했던 것. 이미 사장되었던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은 그때서야 빅히트가 터지며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와 더불어 여름시즌의 양대 산맥으로 완벽하게 부활했다.

70년대 남성들은 긴 머리의 여성에 대한 로망이 강렬했다. 20대 초반부터 탈모 현상이 심했던 작곡가 박성규는 남이섬 여름야유회 때 본 긴 머리 소녀의 이미지를 불멸의 노래로 승화시켰다. 그런 점에서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은 70년대 남성들의 로망과 낭만을 가득 담아낸 최고의 여름 명곡이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