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극단의 표현수위가 주제를 견인 못한, 고어 엔터테인먼트

<악마가 보았다>의 기자시사가 예정된 하루 전날, 홍보사의 급한 전화를 받았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악마를 보았다>에 대해 '18세 관람가'가 아닌 '제한상영가' 등급을 매겼다는 것.

급히 영등위의 심의 내용을 반영해 재편집해야 하는 상황이라 기자 시사를 연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연쇄살인범에게 약혼자를 잃은 한 남자가, 단순한 응징을 넘어선 끔찍한 복수를 시작한다는 줄거리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표현 수위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항상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스타일"을 중시하는 김지운 감독이 얼마나 깜짝 놀랄 '고어 스타일'을 창조했기에 오랜만에 영등위가 들썩이는 걸까. 최민식 이병헌, 소위 스타 파워까지 단단히 갖춘 영화를 '일시 정지' 시킬 정도면 표현수위가 예사롭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제작사 측은 아쉽지만 문제로 지적된 몇몇 장면을 편집한다는 결론을 냈다.

아쉽고 갑갑했다. 아직도 누군가의 '기준'에 따라 내가 볼 수 있는 장면과 볼 수 없는 장면을 구분 당해야 하다니. 잘려나간 장면이 비록 참지 못할 만큼 참혹하더라도, 인간 심연의 악마성을 끄집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장면이면 어쩌나. 일주일 후, 개봉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기자시사를 통해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함박눈이 소담하게 내리는 교외의 시골길을 비추며 시작한다. 서정적이면서도 쿵짝쿵짝 리듬이 경쾌한 음악이 흐르면서 카메라는 시골길을 유랑하듯 미끄러진다. 딴 청하는 듯한 음악과 카메라의 시선, 그리고 한적한 시골길의 조합은 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가운데, 저 멀리 멈춰 선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안엔 약혼자 수현(이병헌)과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주연의 모습이 보인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던 중, 노란 학원 버스 한 대가 주연의 차 앞에 선다. 평범해 보이는 한 남자(물론 관객은 모두 그가 연쇄살인마 경철(최민식)이라는 걸 알고 있다)가 그녀에게 "도와주겠다"며 말을 걸고, 주연은 조심스럽게 사양한다.

주연은 나름의 안전 철칙을 다 지켰다. 재빨리 보험회사에 전화를 했고, 낯선 이가 다가오자 문을 잠그고 창문을 조금만 내렸으며, 그의 호의를 거절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현과 휴대전화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주연의 모든 노력은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간다. 경철은 번개처럼 다가와 가뿐하게 주연의 차 유리창을 부수고 그녀를 가차 없이 폭행한 뒤, 어디론가 끌고 간다.

주연이 흰 눈 밭에 붉은 핏줄기를 남기고 질질 끌려가는 장면 위로, 제목이 스믈스믈 떠오른다. '악마를 보았다'. 이 오프닝을 이처럼 자세히 묘사하는 이유는, 본편을 시작하기 전인 이 장면까지가 <악마를 보았다>에서 가장 강렬한 스릴과 두려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 후로는 그다지 놀라울 것도, 끔찍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는 뜻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경철에게 포획당한 주연은 겨우 숨만 붙어서 살아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경철은 분주히 살인의 도구를 준비한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 주연은 "아기를 가졌다"며 경철에게 마지막으로 생명을 애걸한다. 이때 주연의 말에 반응하는 경철의 리액션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대체 포획물의 임신과 나의 작업(살인)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1/3쯤은 진정 모르겠다는 듯, 1/3은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그녀의 소원이 애처롭다는 듯, 1/3은 그렇기에 더욱 흥분된다는 듯, 최민식은 찰나의 머뭇거림으로 연쇄살인마 경철의 심리를 표현한다. 이 후, 최민식은 더욱 그악스러운 범죄행각을 벌이지만 이 순간의 강렬함을 넘어서진 못한다. 결국 주연은 살해되고, 약혼자 수현은 갈갈이 찢긴, 겨우 머리만 남은 약혼녀와 마주한다.

영화는 수현을 위해, 그리고 관객을 위해 기어이 그녀의 잘린 머리가 바닥에 뒹구는 장면을 보여준다. 수현은 관객을 대신해 약속한다. "반드시 네가 당한 고통의 열배 백배를 갚아주겠다"고. 이 한 마디로 수현의 정당성은 확보된다. 수현은 국가정보원 경호요원이라는 신분을 활용해 금세 경철의 뒤를 밟는다. 마침내 경철과 마주한 수현이 그를 제압하고 무거운 돌덩이를 내리쳐 죽여야 하지만 수현은 그에게 편안한 죽음을 줄 생각이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수현은 하나씩, 하나씩 경철의 육체를 훼손하는 것으로 복수의 포문을 연다.

<악마를 보았다>는 복수의 대상을 좇는 직선의 구조 대신 경철과 수현이 만났다 헤어지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때리면 때릴수록 날이 서는 칼처럼 두 사람은 만났다 헤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날카롭고 폭발적인 변화를 보여줘야 했다. 두 사람이 붙을 때마다, 복수와 응징, 피해와 가해의 기준이 점차 모호해지고 뒤엉키면서 결국은 감독이 제목으로 호언장담한 바대로 "악마를 보"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둘의 만남이 반복될수록 영화는 지루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강도가 세지는 건, 신체훼손의 강도뿐이다. 제 아무리 산 사람을 썰고, 으깨고, 심지어 먹는 장면까지 질기게 보여주지만, 오프닝에서 최민식이 이미 보여준 섬뜩함을 넘어서지 못한다. 약혼녀의 잘린 머리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수현에 대한 공감 혹은 연민도 옅어진다.

그가 어느 샌가 경철 못지않은 폭력을 휘둘러서가 아니라 경철과 두 번째 만남 이후로 수현은 수퍼맨 놀이에 빠진 남자처럼 굴기 때문이다. 경철 역시 위악을 떨면 떨수록 그저 발정난 변태성욕자로 보일 뿐이다. 결국 수현의 실수로 애꿎은 사람들이 경철에게 희생되고, 수현은 나름의 '악마적'인 방식으로 경철을 처단한다. 하지만 거기에 악마는 없었다. 인간의 악마성에 대한 설익은 고정관념과 빈약한 상상력에 제목만 거창해졌다. 어느 샌가 실종된 리얼리티는 차치하고라도, 어느 순간 보여주고 싶었던 무언가를 잃고 방황하는 수준이 된다.

처음 걱정했듯, <악마를 보았다>를 본 뒤 아쉽고 갑갑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영등위가 편집하길 권유한 그 몇몇 장면을 더 본 들, 영화의 완성도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편협한 기준으로 볼 것과 보지 말 것을 나눠주는 관행은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체훼손의 극단적은 표현수위? 그건 차고 넘치는 B급 고어영화, 아니 한국에서 매해 잊지 않고 개봉하는 <쏘우> 시리즈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들쭉날쭉한 잣대가 왜 필요한지 의문이다. <악마를 보았다>를 본 뒤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 <조용한 가족>을 다시 보았다. <악마를 보았다>의 피칠갑 속에서도 <조용한 가족>의 코미디가 솟아오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곤 김지운 감독이 코미디에 확실히 뛰어난 감독임을 확인했다. 종종 난망한 상황에서 웃음이 터지는 고어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에겐 <악마를 보았다>가 나쁘지 않은 엔터테인먼트가 되겠지만, 악마를 보고자 한 관객에겐 큰 의미도 여운도 없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