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조원희 김상화 감독의 <죽이고 싶은>병실과 환자 핸디캡으로 두 팔다리 꽁꽁 묶은 덕에 새로운 에너지 얻어

요즘 한국 영화들은 '복수'에 꽂혀있다. 여전히 박스오피스 1등을 놓치지 않고 있는 <아저씨>가 옆집 소녀를 대신한 차가운 복수극이라면, <악마를 보았다>는 죽은 약혼자를 대신한 뜨거운 복수극이다.

천호진과 유해진이 주연을 맡은 <죽이고 싶은> 역시 사랑하는 여인을 죽이고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원수를 향한 복수극이다. 복수를 결심한 이유는 달라도, 공통점이 있다.

세 영화 모두, 복수의 결과로 상대의 죽음을 원한다는 것. 단순히 '잡는' 것을 넘어 직접 처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복수의 목적, 즉 복수 상대의 죽음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살펴보면 각 영화의 성격이 드러난다.

<아저씨>는 목표를 향해 곁을 둘러보지 않고 직진한다. 최대한 빨리 복수 대상을 처형하는 것이 목적인 영화답게, 집행의 과정인 액션도 단검을 사용한 직선적인 액션을 활용한다. 때문에 꽤 잔혹한 표현수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집행이 성공했을 때 통쾌함과 후련함을 느낀다.

한 편 <악마를 보았다>의 목표는 괴롭히는 것이다. 복수 대상에게 최대한 길고 혹독한 고통을 주는 것. 때문에 영화의 집행 과정 역시 나선을 그리며 빙빙 돌고 반복된다. 많은 관객들이 <악마를 보았다>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신체 훼손의 표현 수위 자체가 아니라, 신체 훼손을 보여주는 시선의 집요함에 있다.

일반적으로 관객이 "이 정도면 감독의 의도를 알 만큼 충분히 봤다"고 느끼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대부분의 고어 신에서 그 이상의 시간을 할애한다. 복수 대상에 대한 '괴롭힘'이 관객을 향한 것으로 번지면서 불편함이 발생하는 것이다.

각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관객의 몫이지만, 두 영화 모두 복수극의 '집행 과정'을 새롭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분명히 칭찬받을 만하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이해영 감독은 트위터에 <아저씨>의 액션에 대해 "앞으로 향후 10년 간, 한국의 액션 영화들은 이 작품을 염두에 둬야 할 듯"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확실히 <아저씨>의 간결하고 직선적인 액션, 특히 근거리에서 촬영한 단검 액션은 영화의 목표에 부합하며 차가운 폭발력을 가진다. <악마를 보았다> 역시 주류 상업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고어 표현에 도전한 것은 새로운 시도다. 하지만, 이 두 편의 복수극에서도 알 수 있듯, '복수'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악마를 보았다>처럼 뜨겁거나, <아저씨>처럼 차갑거나. 그래서 또 '복수 영화'가 나온다고 했을 때, 조금 식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이고 싶은>은 '무기력 액션'이라는 새로운 집행 방식을 선보이며 선전한다.

영화는 중년의 남자 김민호(천호진)의 일기 같은 독백으로 시작한다. "1984년 7월25일, 날씨 맑음. 나는 오늘 한 남자를 죽이려 한다. 미치도록 죽이고 싶었던 그 놈. 바로 나였다." 영화는 이미 '식물인간'에 가까운 김민호가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모습과 구사일생으로 살아 원치 않는 치료를 받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죽으려고 하는 이유는 과거의 어떤 기억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삶의 의지를 잃은 김민호 앞에 그가 "아내 수진을 죽인 원수"라고 생각하는 남자 박상업이 나타난다.

퍽치기로 뇌손상을 심하게 입은 박상업은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 김민호의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박상업의 명줄을 끊어놓고 싶지만, 그는 자살 시도의 후유증으로 온 몸이 마비되어 있다. 원수를 '죽이고 싶다'는 의지는 김민호에게 생의 목적이 되고, 박상업을 '제대로 죽이기' 위해 물리치료를 시작한다.

하지만 좀 수상한 점이 있다. 두 사람은 실험적인 약물치료를 받으면서 상태가 급속도로 호전되고, 박상업의 기억도 점점 돌아오는데, 그는 "수진이는 나의 아내이며, 그녀를 죽인 건 김민호"라고 주장한다. 김민호는 투약의 영향으로 악몽과 환각에 시달리고, 자신의 기억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하지만 증명할 도리가 없다. 때문에 두 남자는 "나쁜 놈은 너, 수진의 남편은 나"라고 주장하면서, 서로를 향해 복수의 의지를 불태우는 것이다. 이제 '죽이고 싶은' 남자들의 '무기력 액션'이 더욱 빛을 발한다.

이 무기력 액션은 <죽이고 싶은>의 가장 빛나는 성취다.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과 달리 <죽이고 싶은>은 복수의 대상을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는다. 너 아니면 내가 '나쁜 놈'인 상황. 바꿔 말하자면, 복수 대상이 확실해 질 때까지 둘 중 하나가 죽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영화는 김민호와 박상업에게 완력을 제거시킨 뒤, 병실에 가둔다. 그리고 서로를 '죽이기 위해' 벌이는 행동이 오히려 두 사람을 '살리는' 치료로 변화한다. 김민호를 죽이려하는 박상호의 등장 자체가 김민호에겐 생의 의지를 불태울 계기가 되고, 김민호는 "탁구공 하나라도 잘 못 맞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박상업을 죽이기 위해 뇌에 충격을 주지만, 반작용으로 박상업의 기억이 돌아오는 식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속담에 빗대자면, <죽이고 싶은>은 '잇몸으로 차돌을 씹어 먹는 영화'다. 병실과 환자라는 핸디캡으로 두 팔다리를 꽁꽁 묶은 덕에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두 남자가 병실의 시시콜콜한 소품을 활용해 서로를 죽이기 위해 안달복달한다는 아이디어는 '죽음'을 향한 긴장감과 함께 유머를 품는다.

스타킹에 비누를 넣어 요요 같은 무기를 만들어 박상업을 공격하는 김민호의 몸부림은 처절하면서 웃긴다. 식물(같은 인간)에 동물성을 주입했을 때, 발생하는 무기력 액션은 매우 신선하다. 자칫 우스울 수 있는 무기력 액션에 무게감을 심은 건 천호진과 유해진의 묵직한 연기력이다. 분명히 웃긴데 문득 섬뜩한 표현력이 훌륭하다.

또한 한정된 공간의 연극적 설정에서 영화적 역동성을 건지는 연출도 신선하다. 단, 영화의 '어떻게' 만큼 '왜'가 신선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두 사람의 과거와 이 상황을 만든 누군가에 대한 설명은 반전을 위해 급작스럽게 튀어나오고, 착한 유 간호사와의 관계 등은 눈치 채기 쉬운 복선이다. 반전보다는 두 남자의 무기력 액션에 집중했다면 훨씬 인상적인 복수극이 탄생했을 것 같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