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지난 15일 막을 내린, 15회 부산국제영화제를 다녀왔다.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마지막 영화제라는 아쉬움이 컸던 탓인지 여기저기서 "볼 영화가 많지 않다더라"는 식의 '카더타' 통신 탓에 기대가 크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최근 한국영화계의 불황 여파로, 영화제의 열기가 몇 년째 조금씩 시들해지는 감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찾은 부산국제영화제는 '조용한 잔치에 먹을 것 많다'는 반전을 선사했다. 밤의 해운대를 밝히던 파티의 불빛은 줄었지만, 그냥 넘어가면 땅을 치고 후회할 알짜배기 영화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영화제의 진짜 내실은 결국 '좋은 영화' 아니던가. 이런 기준에서라면 15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성공적이다.

예전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입소문을 타면, 비록 몇 백만 관객은 너끈히 책임지는 상업영화가 아니라 할지라도, 곧 개봉을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시장이 얼어붙은 최근엔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때문에 영화제에서 놓치면 극장에서 보기 힘든 경우가 많아졌다. DVD나 VOD 서비스 역시 언감생심이다.

다행히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선 감독과 배우의 브랜드 파워로 일반관객도 극장에서 만날 수 있을 영화가 많다.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감성 멜로'라는 타이틀이 과연 어떤 영화를 지칭하는지 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탕웨이와 현빈의 호흡은 기대했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김태용 감독의 연출력에 감탄할 일이다.

그 밖에 이상일 감독이 연출하고 츠마부키 사토시와 후카츠 에리가 주연을 맡은 <악인>은 '감성 스릴러'의 정수다. 자신을 연쇄살인범이라고 고백한 남자와 그걸 알면서도 그와 함께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나는 여자의 멜로이자 악한 본성에 대한 보고서이며, 심리 스릴러의 긴장감까지 골고루 갖춘 수작.

올해 부산 최고의 '오락영화'를 꼽자면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일본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13인의 자객>과 태국의 위시트 사사나티엥 감독이 40년 만에 부활시킨 태국 토종 히어로 <레드 이글>이 자웅을 겨룬다. 오락영화의 완벽한 구조와 초호화 배우진의 검기로 치자면 <13인의 자객>은 감히 대적할 만 한 자가 없는 고수다.

한편 태국 영화계의 젊은 피, 위시트 사사나티엥의 <레드 이글>은 히어로 영화를 두려워하는 한국 영화들이 눈 여겨봐야 할 선배다. 같은 아시아의 '히어로'인데, <레드 이글>은 촌스럽지 않다. 조금 칭찬을 보태자면 할리우드 엄친아 히어로 '아이언 맨' 안 부럽다.

문제는 숨겨진 보석들이다. 영화제 기간 중 3~4회 상영으로 1000여 명의 관객만 감동시키고 홀연히 사라지기에 너무나 아쉬운 영화가 수두룩하다. 그 중 뒤통수를 가격하는 묵직한 충격을 선사한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캐나다 산이다. '북미 영화'라면 미국만 알았던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캐나다 영화의 저력을 알린 작품은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Incendies>과 자비에 돌란 감독의 <하트비트 Les Amours Imaginaires>.

먼저 가을에 꼭 어울리는 멜로 <하트비트>는 연애의 두근거림이 어떻게 '조작'되는지 탐구하는 발칙한 러브스토리다. 데뷔작 <나는 엄마를 죽였다>로 2009년 칸국제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되어, 신인감독상에 해당하는 황금카메라 상을 수상한 청년 감독 자비에 돌란은 두 번째 장편 <하트비트>를 통해 '소포모어 징크스'를 훌훌 털어냈다.

보는 내내, 과거의 연애들이 둥둥 떠다니는 경험을 할 수 있을 로맨스 영화. 반면 <그을린>은 그야말로 빼어나다. 올해 최고의 발견이라고 소문 내도 전혀 두려울 게 없다. 영화는 엄마의 유언에 따라 뿌리를 찾아 중동으로 여행을 떠나는 쌍둥이 남매의 이야기다. 두 사람은 어머니의 유서를 통해 중동에 살아있는 아버지와 형제를 찾으러 가달라는 부탁을 듣는다.

자비에 돌란 감독의 <하트비트>
아버지는 오래 전 세상을 떠났을 거라 믿었던 그들은 충격에 빠지지만,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중동을 찾는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입 벌리고 있는 진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관객들은 쌍둥이 남매의 여정을 함께 걸으며 거대한 역사가 개인사에 생채기를 내는 순간들을 목도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것은, 피해자인 힘없는 개인이라는 진리를 깨우친다.

묵직한 이야기를 추리소설처럼 빠르고 긴장감 있게 엮어낸 감독의 솜씨에 혀가 내둘러진다.

캐나다에만 진실을 향한 뚝심 있는 시선이 있는 건 아니다. 다들 외면하는 엄혹한 현실, 그 자체를 노려보는 장률 감독의 시선 <두만강>도 반드시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다. 재중동포 중국감독으로 <당시> <망종> <중경> <경계> <이리> 등 현실의 냉혹한 변두리에 밀려난 사람들을 바라봤던 그가, 이번엔 탈북자 소년과 중국 국경지대 소년의 우정을 통해 '탈북자'의 현실을 응시한다.

두만강 접경 지역은 중국이기도, 혹은 북한이기도 하다. 오랜 주민들은 모두 수 십 년 전 북한에서 건너온 사람들이고, 지금도 두만강이 꽁꽁 얼면 위아래 동네를 오가듯 북한 소년들이 몰래 오간다. 장률 감독은 언제나 그랬듯,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고 그 중앙에 단단히 카메라를 세워둔다.

마을 소년들은 "볼을 잘 차는" 강 건너온 소년을 스스럼없이 친구 삼고, 마을 주민은 몰래 탈북자들을 도우며 돈을 번다. 목숨 걸고 강을 건너 온 탈북자는 마을 소녀의 은혜를 배은망덕으로 갚고, 오래 전 북에서 넘어온 할머니는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어 고향으로 가기 위해 매일 집을 나선다.

보는 것만 코끝이 시릴 만큼, 싸늘한 두만강 겨울을 배경으로, 어쩔 수 없는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우리네 동포'들의 일상은 가슴 갑갑하도록 엄혹하다. 분명 지금 이 순간, 멀지 않은 땅에서 벌어지는 현실이지만, 너무 엄혹해서 판타지처럼 느껴질 정도다. 은 이것이 현실임을 잊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경종이다. 엄혹한 현실에 한 치도 더 하거나 덜어내지 않는 그의 정직한 카메라가 남기는 파장은 크고, 길다. 이런 작품들을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는다면, 그건 관객에 대한 배신이다.


장률 감독의 <두만강>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