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호세 캄파넬라 감독의 '엘시크레토-비밀의 눈동자']사랑, 기억, 복수의 시간 쫓는 마술 같은 카메라 우아한 스릴 완성

과거란 우리가 흘러간 시간 뒤에 묻어버린 어떤 것이다. 망각이라는 튼튼한 자물쇠로 과거를 걸어 잠그고, 오늘의 문을 열어 내일을 향해 가는 것이 삶의 보편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이건 그렇게 되길 바라는 우리의 소망이 빚어낸 착각이다.

과거의 어느 순간들은 평생토록 오늘을 붙들고 늘어진다. <엘 시크레토-비밀의 눈동자>의 후안 호세 캄파넬라 감독은 지독하게 우아하고 섬세한 방법으로, "삶은 그저 내일로 흐른다"는 우리의 착각을 깨뜨린다. 과거는 묻을 수도 없고, 묻히지도 않는 그 무엇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홀로 책상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백발이 성성한, 중년을 훌쩍 넘기는 남자의 이름은 벤야민 에스포지토(리카도 다린). 그는 무언가를 계속 쓰기 위해 애쓴다. 썼다가 찢어 버리고, 다시 썼다가 찢기를 반복하던 벤야민은 깜빡 잠이 들었다가 소스라치듯 일어나 한 단어를 메모한다.

"두렵다" 벤야민이 골몰하고 있는 건 25년 전에 벌어진 강간 살인 사건. 벤야민은 사건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 과거 직장이었던 법원으로 향한다. 벤야민이 찾아간 곳은 아름다운 검사 이레네(솔레다드 빌라밀)의 사무실. 이레네는 25년 전 법원 직원이었던 벤야민의 상사였고, 당시 벤야민이 남모르게 마음에 품었던 첫사랑이기도 하다.

25년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담담하게 '모랄레스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까마득한 과거의 사건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시간은 훌쩍 25년을 거슬러 오른다. 젊은 검사보 벤야민은 아름다운 사무관 이레네를 보자마자 한 눈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던 어느 날, 벤야민은 이례적으로 강간 살인사건 현장으로부터 호출을 받는다.

툴툴거리며 현장을 찾은 그의 눈앞에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나신의 여인이 지독하리만큼 처참한 몰골로 살해당한 광경이 펼쳐진다. 경찰은 애꿎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죄를 덮어씌워 상황을 종결시키지만, 진범은 분명히 따로 있음을 확신한 벤야민은 사건 발생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무리하게 수사를 원점으로 돌린다.

벤야민을 움직인 것은, 죽은 여인의 남편 모랄레스(파블로 라고). 꿈같은 신혼 생활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그는 하염없이 죽은 아내의 사진만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모랄레스가 건넨 앨범에서 죽은 여인을 향한 한 남자의 수상한 시선을 발견한다. 죽은 릴리아나를 어린 시절부터 짝사랑했던 고메즈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검거에 나서지만, 이미 그는 자취를 감춘 상황. 법원에서는 사건을 종결지었지만, 벤야민에게도, 모랄레스에게도 결코 이 비극은 과거가 될 수 없었다.

모랄레스는 퇴근 후 하루도 빠짐없이 고메즈가 나타날 만한 기차역을 찾아가 그를 기다린다. 모랄레스의 눈에서 결코 식지 않을 사랑을 본 벤야민은 이레네를 설득해, 절친한 동료 파블로(귀에르모 프란셀라)와 함께 수사를 재개한 것이다.

그렇게 고메즈의 뒤를 쫓던 벤야민은 파블로의 기지 넘치는 추리를 실마리로, 드디어 고메즈를 잡는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고메즈는 반정부인사들을 숙청하는 정부요원으로 발탁되면서, 종신형은커녕 권력을 등에 지고 거리를 활보한다.

벤야민의 박탈감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사랑하지만, 신분의 차이 때문에 차마 다가가지 못했던 이레네가 결혼을 발표한 것. 좌표를 잃은 벤야민에게 예상치 못했던 비극적 사고가 벌어지고, 벤야민은 '모랄레스 사건'으로부터,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도망친다.

<엘 시크레토-비밀의 눈동자>는 긴장감 넘치는 범죄 드라마와 안타까운 사랑 사이, 70년대 현재의 시간 사이를 성큼성큼 오간다. 사실 '오간다'는 설명은 적절치 않다. 우리가 문득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때처럼, 묻어둔 줄로만 알았던 과거가 불쑥 현재의 시간에 끼어드는 것이라 봐야 옳다.

즉 '모랄레스 사건'과 '이루지 못한 벤야민의 사랑'도 결국 한 덩이의 사건이고, 도망쳐 나왔던 70년대와 외롭게 늙어가는 현재도 결국 한 덩이의 시간이다.

뚜렷이 시점과 이야기, 시공간을 구분하는 대신,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유기체로 숨 쉬게 만드는 건 혼이 나갈 만큼 아름다운 카메라 워크다. 카메라 워크에 '아름답다'는 수식이 이상하게 들릴 진 모르지만, 영상을 보면 이 움직임을 '아름답다'고 밖엔 표현할 수 없다.

배경과 인물의 거리감을 통해 심리상태를 전하는 수많은 앵글도 감탄스럽지만, 벤야민과 파블로가 로메즈를 잡는 축구장의 추격 신 롱테이크는 숨 쉬기 힘들 만큼 아름답다.

영화의 매끄러운 이음새는 배우들의 공이기도 하다. 모든 배우들은 간단한 염색과 분장만으로 25년의 시간을 능숙하게 오가는데, 카메라의 움직임과 맞물리면서 일종의 판타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에두아르도 사체리의 소설 <그의 눈 속의 의문>을 영화로 옮긴 <엘 시크레토-비밀의 눈동자>는 결말은 다르지만 원작이 내포하고 있는 사랑과 기억, 집착과 복수 등 하나 같이 쉽지 않은 주제들을 녹여내는 데 성공한다.

부유하던 과거가 매듭지어지는 마지막 순간, 스릴러 복수극에 눈길을 빼앗겼던 관객이든, 차마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마음을 두었던 관객이든,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2010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는데, 그해 세계 영화계를 흥분에 빠뜨렸던 <하얀 리본> <예언자> 등 쟁쟁한 경쟁작을 가뿐히 제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천편일률적인 입맛에 대해 툴툴대다가도 종종 외국어영화상에서 보물을 골라내는 안목을 보면, 아직 죽진 않은 듯. 고갈에 허덕이는 할리우드는 즉각 영화의 판권을 구입해 리메이크에 착수했다고 한다.

워너 브라더스가 제작하고 <새터드 글래스>의 빌리 레이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아르헨티나산 영화의 강렬함과 우아함을 제대로 살려낼지는 미지수. 2010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올해의 영화 한 편을 건졌다. 복수극을 염두에 두고 있는 한국의 감독님들에게도 강력 추천한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