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흔적 찾기' 정서적 일관성 유지[우리시대의 명반ㆍ명곡] '9와 숫자들' 1집 下 (2009년 파고뮤직)좋은 가사, 짜임새 있는 멜로디, 창작에 무게 중심 둔 13곡 담아

팀 이름이 <9와 숫자들>이니 기호학적인 컴퓨터 세대를 대변하는 난해한 음악을 연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수용할 수 있는 80~90년대 가요의 질감이 가득하다.

<9와 숫자들>이 구사하는 가요는 이전 세대의 정서를 복원하면서 요즘 감각의 음악적 재해석을 통해 팝의 감수성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가슴네트워크가 발표한 <2009~2010년 최우수 루키앨범>에서 창작부문 1위로 선정된 <9와 숫자들>의 1집엔 13곡이 수록되어 있다. 각 트랙은 '사랑'이라는 큰 틀 속에서 '추억'과 '흔적'찾기라는 정서적 일관성을 유지하며 장르규정이 불가능한 다양한 사운드를 구현하고 있다.

음악 장르에 매몰되기 보다는 좋은 가사, 짜임새 있는 멜로디 창작에 무게 중심을 실은 앨범이란 이야기다.

흥미로운 점은 뽕뽕거리는 복고사운드를 대변하는 영국 일렉트로닉 팝 듀오 펫 샵 보이스와 브릿팝의 원조인 스톤 로지스 그리고 기억조차 아련한 추억의 국내밴드 키보이스와 작은별가족, 한스밴드의 느낌까지 다채로운 복고 사운드가 복합적으로 뒤섞인 다양성에 있다. 그러니까 70~80년대 영국의 신스팝을 음악적 기반으로 익숙한 가요 정서를 통해 새로운 감각의 음악을 제시한 앨범이다.

이 점에 대해 리더 송재경은 "하나의 이미지를 찾기보다는 하나하나의 노래에 애정을 가지고 그 노래들을 맞는 옷을 입혀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록 이외는 음악도 아니라고 생각한 <그림자 궁전>시절, 넘치는 그의 음악적 야심은 창조를 위해 모방과 오마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과의 소통과 교감이 없는 허깨비 같은 자기만족에 불과했다는 공허감을 안겨주었다.

<9와 숫자들>의 작업이 이전과 완벽하게 다른 질감인 것은 음악적으로 억압한 작가주의에 대한 환멸과 반성의 결과물이다. 보편의 언어를 넘어 상투적인 표현까지 과감하게 가사에 도입한 이번 앨범은 그의 체질변화를 증명한다. 물론 그 때문에 "초등학교 교과서 펴놓고 뒤적이면 나오는 수준"이란 충격적인 대중적 반응도 감수해야 했지만.

사실 전 세계적으로 공인된 명곡들의 공통점인 쉽고 단순한 음악 경지는 결코 쉽지 않다. 사랑을 소재로 한 무수한 대중가요가 음악애호가들로부터 외면받는 이유는 단순함이 아닌 구태의연함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이 사랑이라면' 같은 곡에서 '산소는 충분했지만 알 수 없는 호흡곤란'으로 사랑의 정의를 내린 송재경의 기막힌 언어구사 능력은 이 앨범이 왜 신선하고 새로운 가요 어법을 제시한 탁월한 창작앨범인지를 증명해준다.

첫 트랙 '그리움의 숲'은 나이 차이가 극심한 아름다운 연상의 선생님에 대한 절절했던 짝사랑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승화한 노래다. 일말의 기대도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몸살을 앓아 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슬픈 사랑 이야기다.

'말해주세요', '칼리지부기' 그리고 가볍고 경쾌한 록 버전 '선유도의 아침'도 중독성을 발휘하는 필청 트랙이다. 이 앨범 최고의 명곡인 '삼청동에서'는 이 앨범의 결론일 것이다.

'연날리기'는 사랑탐구 작업인 앨범 수록곡들과는 이질적이다. 창작의 욕망에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부른 위로의 노래이기 때문. 그는 "내 자신이나 사람들 모두를 보듬고 싶어 슬픈 정서들을 다 수용하고 감싸주는 마음으로 곡들을 만들었다. 이번 앨범은 평가가 아닌 기쁨을 위해 만들었기에 사실 음악적 평가에 대한 기대감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겸손해 한다.

리더 송재경은 <그림자궁전> <9와 숫자들>외에도 과거 관악포크협의회 시절 창작해둔 키치적 요소가 넘쳐나는 한국형 포크를 선보일 1인 프로젝트 <성냥탑>과 작가주의와 대중성의 중간적 위치에서 더 가벼운 기타 팝을 추구하는 프로젝트 밴드 <걸리버스> 앨범을 발표할 계획이다.

디스코그라피가 웅변하듯 한 곳에 안주하기를 싫어하는 그는 아직 자신만의 음악 스타일에 안착하는 원숙함보다는 한 입 깨물었을 때 시큼한 설익은 맛을 내는 새로운 음악실험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 나쁠 것은 없다. 그의 음악적 갈증이 치열할수록 대중은 더 많은 신선함을 경험할 것이기에.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