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드라마

우리의 현실 속에는 진짜 공주나 왕자가 없다. 하지만 미디어를 통해 대중은 지속적으로 공주와 왕자 이미지를 탐식한다.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퓨전 사극을 통해서, 재벌가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외치는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를 통해서, '공주병'과 '왕자병'이라는 일상적 기호를 통해서.

어릴 적 꿈이 '공주'인 소녀들은 자라서 절대로 공주처럼 살 수 없는 각박한 현실에 눈물 흘린다. 수많은 여성들은 어릴 적에 레이스와 프릴이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고 공주놀이도 해봤고, <슈렉>에 나오는 프린스 차밍 같은 왕자가 언젠가는 '현실'이라는 높은 탑에 갇힌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상상도 해봤다.

우리 모두를 기꺼이 마법의 성에 갇힌 공주로 만들어준 '더 클래식'의 노래는 자신은 결코 '공주병'이 아니라고 믿었던 어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지 않았는가.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이제 나의 손을 잡아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우리 앞에 펼쳐질 세상이 너무나 소중해. 함께라면."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는 이렇듯 '우리 마음 속에 숨길 수 없는 공주 본능'을 유쾌하게 자극한다.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이설(김태희)에게 찾아온 인생 최고의 로또, 그것은 '대한민국 황실의 공주'라는 숨겨진 혈통의 진실이었다. 이런 설정은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그 상투적인 상상력을 '그럴 듯하게' 만들어주는 디테일이 워낙 출중하다.

등장인물은 저마다의 절실한 사연과 저마다의 구체적인 일상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설은 온갖 알바 자리를 전전하며 '입양아'라는 자신의 엄연한 현실과 고군분투하는 중이며, 이설의 어머니(임예진)는 입양한 동갑내기 두 딸을 키우며 소박한 펜션을 운영하고 있고, 재벌 3세 박해영(송승헌)은 진정한 현대판 황태자 자리를 난생 처음 보는 엉뚱한 여자에게 빼앗길 상황에 처해 '어떻게 하면 그녀가 공주가 되지 않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수십 년 동안 '사라진 황세손의 친딸'을 찾던 대한그룹 회장(이순재)은 전 재산을 사회로 환원하여 '황실 재건안'의 성사에 투자하고자 한다. 하루아침에 자신이 대한민국 황실의 공주라는 것을 알게 된 이설의 간절한 소망은 사실 공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는 일이었다.

아직 자신이 황세손의 친딸임을 몰랐던 이설에게, 진짜 부모님을 찾게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박해영. "세무서부터 찾아가야죠. 재산 얼마인가 확인해 보게!"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그럼 그 다음엔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박해영의 질문에 이설은 쿨하게 대답한다.

"동사무소 가야죠. 형제자매 몇 명인가 보게!" 친부모를 찾더라도 오직 '현실적인 상속'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는, 이 현대판 공주의 엽기발랄한 캐릭터는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다'는 속담보다는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속담에 더 어울린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마음속으로 참아내고 있었던 슬픔은 너무 크다. 양어머니는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만, 같은 입양아인 언니의 밥그릇에 소세지 하나만 더 얹혀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잠깐 없기만 해도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녀가 기억할 수 없는 어린 시절, 친아버지인 황세손이 견뎌야 했던 진짜 삶은 더욱 비참했다. "참 신기합니다. 이름을 버리고 죽은 듯 살아도 어찌들 알고 그리 찾아들 오시는지. 날 황세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이끌려 장터에서 약도 팔아봤고 투전판 협잡꾼들의 방패막이라도 살았습니다. 제 조부님과 회장님 사이에 어떤 악연이 있었든 그것은 지난 일입니다. 전 이제 잊혀지고 싶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공주'로 대접받게 된 그녀가 느낄 어지럼증도 만만치 않지만, 태어날 때부터 황태자로 태어나 '재벌 3세'에게 보장된 탄탄대로를 걸어온 박해영은 거꾸로 '왕자에서 평민으로' 추락하는 고통을 맛본다.

재벌가의 경영권 세습이라는 낡은 사고방식을 던져버리고 재벌총수 수업도 포기한 채 자신이 선택한 외교관의 길을 우아하게 걸어가던 박영재. 그렇게 현실에서는 정말 찾아보기 어려운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던 그에게 할아버지는 '전 재산 사회 환원'이라는 청천벽력을 안겨주고 만다.

대한민국을 이끄는 기업의 CEO 자리까지 포기했는데 '전 재산'까지 포기하라니,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하루아침에 '레알 공주'가 된 이설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도 만만치 않다. 그녀는 동화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공주의 달콤한 장밋빛 미래를 연상하지만, 정작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웬만한 고시공부는 저리가라 할 스파르타식 '공주수업'이다.

그녀가 찾고 싶었던 건 단지 '금방 올게'라고 속삭인 후 떠나가 버린 아버지를 찾는 것뿐이었는데, 그녀는 덜컥 전 국민이 투표해준 '황실재건안'의 성패를 좌지우지해야 할 엄청난 사회적 책임감을 안게 된 것이다.

<마이 프린세스>는 누구나 어린 시절 한번쯤 꿈꾸었던 '공주가 되고 싶어요'라는 환상 속에 숨겨진 현실적 욕망의 코드를 예리하게 짚어낸다. 널 버린 부모님이 원망스럽지 않냐는 해영의 질문에 이설은 천연덕스럽게 눙친다.

"꼭 고아가 아니라도 어릴 땐 다 그렇지 않나? 어렸을 때 부모님 원망 한 번도 안 해봤어요?" '나의 진짜 현실 속 결점 투성이 부모'가 아니라 '어딘가에서 나를 애타게 찾고 있는 멋진 부모'가 있을 것이라는, 너무도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환상. 이 '업둥이 콤플렉스'를 <마이 프린세스>는 발랄하고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의 화법으로 능숙하게 풀어낸다.

어린 시절 영국에 의회와 국무총리가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또 하나의 황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 주변 어른들에게 물어봤다. 왜 저 나라엔 진짜 왕과 가짜 왕이 같이 사는 거냐고. 어른들은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아, 저건 그냥 상징적인 거야. 어린 마음에 그 말은 절대적인 진실처럼 느껴졌다. 상징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국의 여왕은 현실적으로는 유명무실하지만 이미지만 화려한 그런 것이 아닐까 했다. 사람들에게는 진짜 왕은 아니더라도 '왕의 이미지'가 필요했던 걸까.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그 '허울뿐인 상징'이야말로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강자, 현실정치의 강자는 늘 바뀌지만, 사람들은 <로마의 휴일>의 앤 공주(오드리 햅번)처럼 언제나 변치 않는 평화의 사절, 정치적 이해관계에 상관없이 우리 마음 속의 소박한 소원들에 귀 기울여주는 공주 혹은 왕비를 원한다. 왕처럼 군림하지 않고 정치인처럼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은 채, 단지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소원을 이뤄주는 것만으로도 24시간이 모자란 공주.

다이애나비에 대한 전 세계의 열광적 추모는 바로 그런 '잃어버린 상징'을 향한 뼈아픈 애도가 아니었을까. 성(聖)과 속(俗)을 이어주는 메신저, '보통 사람들의 세상'과 '그들만의 세상'을 이어주는 존재가 영원히 사라졌다는 뼈아픈 상실감 아니었을까. 우리 마음속에 영원한 상징으로 남아있는 '진짜 공주'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