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성숙함 부족한 사회… 관대함과 너그러움으로 각광

"나를 찾아줘서 고맙소."

얼마 전 MBC <무한도전>에서 시도한 멤버들의 사람 찾기 프로젝트는 예상 못한 눈물 바람을 일으켰다. 개그맨 정준하가 재수생 시절 자장면 값을 떼어 먹고 도망갔던 중국집 사장님이 20년 만에 스튜디오에 등장해 용서의 말을 건넨 것. 왜소하고 지쳐 보이는 노년의 남자는 "이렇게 성공해줘서 고맙다"며 "그때는 다 그런 거야"라며 웃었고, 그 말에 거구의 정준하를 비롯해 다 큰 남자들 일곱 명이 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다. 이후 웹 상에서는 그를 두고 '진정한 대인배'라는 평이 줄을 이었다.

대인배의 탄생

소인배에서 파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인배라는 말은 사전에 없다. 고서나 무협지에 등장할 것 같은 단어지만 인터넷 신조어다. 큰 사람이라는 의미의 '대인'에 무리를 뜻하는 '배(輩)'가 합쳐진 대인배라는 말이 없는 이유는, 배가 전통적으로 안 좋은 의미의 말에 자주 붙기 때문이다.

선배, 후배라는 단어도 있지만 배가 붙는 단어는 주로 소인배, 간신배, 모리배, 치기배(소매치기 같은 날쌘 좀도둑 무리), 시정잡배, 폭력배 등 좋은 것이 별로 없다.

차두리
게다가 관료나 정치인에 배를 붙인 관료배나 정치배는 관료들과 정치인을 낮잡아 이를 때 쓰인다. 의미 없이 무리지어 다니는 것을 좋게 보지 않은 조상들의 취향 때문인지 '배'는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거론되는 대인배에 무리의 개념은 아예 빠져 있다. 관대한 사람, 순간적인 감정에 휘말려 언성을 높이지 않는 사람, 누구라도 화낼 법한 상황에서 넉넉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대인배다. 지난 1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대한민국 VS 바레인의 아시안컵 예선전에서 선수와 상대편 마르주키 선수가 대립하던 중 마르주키가 차 선수의 얼굴에 침을 뱉는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의 승리로 경기가 끝난 후 선수는 자신에게 침을 뱉었던 상대방과 악수를 하며 유니폼을 교환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경기 후에 차 선수가 자신의 트위터에 남긴 내용은 많은 이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경기가 끝난 뒤 나는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와 악수를 하는 순간, 그 선수가 너무나 불쌍한 표정으로 '쏘리'를 연발하며 유니폼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화가 많이 났지만 영국과의 평가전에서 소위 스타 플레이어인 테디 셰링엄에게 유니폼을 바꾸자고 했다가 완전히 무시당한 경험이 떠올랐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화가 사라지고 괜찮다고 말하며 유니폼을 교환했다. 이게 스포츠인 것 같다. 경기 중에는 이기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지만 끝나면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MBC '무한도전'
지난 연말 SBS <가요 대제전>에서 무대에 올랐던 타이거 JK 역시 대인배라는 칭송을 받았다. 1부 마지막을 장식했던 그의 무대는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반 정도만 나가고 뒷부분이 뭉텅 잘려 나갔다.

이에 그의 아내인 윤미래는 인터넷에 "황당해, 앙코르 무대도 아니고! 뭐야? 왜 짧게 잘라?" 라는 글을 남겼지만 타이거 JK에 의해 다시 사과하는 글을 올렸다. "오빠한테 많이 혼났다. 너무 흥분하다가……기사까지 나올 줄은. So sorry." 그리고 이어 타이거 JK의 메시지도 따라 올라왔다. "생방의 묘미 . 스태프 분들 파이팅. 새해엔 더 멋지게 즐겁게. 컴 온~"

이밖에도 자신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던 김구라와 소주잔을 기울인 하리수, 수상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여러분도) 세계 가난한 아이들과 결연해서 후원하면 좋겠다"라는 말을 남긴 차인표 역시 대인배로 꼽히고 있다.

대한민국은 관대함에 목마르다

대인배가 각광받는 이유는 이 사회에 필요한 성숙함의 절대적 양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범람하는 정신적 '초딩'들로 인해 질식 직전이다. 온라인 상에서는 악플러와 찌질이들이 판치고, 오프라인 세계는 독설가와 궤변론자들로 인해 시끄럽다.

청담동 킥스튜디오에서 열린 '박칼린 감독과의 만남' 행사에서 음악감독 박칼린 씨가 뮤지컬 지망생의 발성을 지도해주고 있다.
미숙한 인격에 성마른 태도로 입부터 열고 보는 그들에게서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려는 일말의 의지도 찾아보기 힘들다. 필요한 것은 딱 한 방울의 이해와 관용이지만 그조차 부족해 온오프 세계는 팍팍하기만 하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보여지는 포용이나 이해, 용서, 나눔 같은 미덕은 상대적으로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자기뿐 아니라 남도 돌아보고, 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간과 에너지, 돈, 정신력을 들여 보듬는 그들에게, 관대함에 목마른 대한민국은 기꺼이 대인배라는 호칭을 붙여주며 환호하고 있다.

기득권층이 될 수 있는 모든 요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쪽을 택한 안철수, 지도자로서 아래 사람들로부터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의 소임에만 집중하는 박칼린 같은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서울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소비트렌드분석센터장인 김난도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2011>에서 다가오는 시대에 점점 더 중요해지는 매너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제성장기 시절, 죽어라 앞만 보고 달려 왔던 대한민국이 좋은 태도, 즉 매너라는 새로운 가치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매너가 중요해진다는 사실은 이제 사회가 성숙기에 이르러 그 동안 챙기지 못했던 중요한 가치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성취 우선이던 대한민국의 패러다임이 결과 지향에서 과정 지향으로 바뀌고 있다. 상품의 질과 가격에만 주목하던 소비자들이 제조 과정의 공정성까지 따지게 된 것은 그 단적인 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주제로 시행한 설문 조사에서 국민의 78%는 "비싸도 착한 기업의 제품을 사겠다"고 답했다. 재미있는 것은 불과 2년 전만 해도 같은 대답을 한 사람들의 비율이 8.8%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소비자들은 이윤 추구에 골몰해 노동착취, 동물학대, 환경오염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며 사회적 구설수를 일으키는 기업에 대해서는 불매운동을 일으키고, 가난한 국가의 여성과 아동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친환경 제품 개발에 주력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높은 충성도로 보답한다.

넉넉한 마음으로 남을 생각하고 포용하는 대인배의 성정은 개인뿐 아니라 집단과 기업에도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미덕이다. 성숙함과 관대함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 사회에서 대인배는 바람직한 신인류의 표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TV 속 유명 인사에게만 돋보기를 들이 대고 대인배니 소인배니 판단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고 평소 발휘하는 이해와 나눔의 빈번도에 대해 가늠해볼 일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