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 보일 감독의 생을 위한 처절한 사투 속 잃지 않는 리듬과 유머

종종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라는 표현을 한다. 아무리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라 해도 상상 못할 기발한 이야기와 놀라운 반전 그리고 긴 울림을 남기는 결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이런 실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복덩이'나 마찬가지다. 듣기만 해도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를 가만 놔둘 리 없다. 결국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는 대개 '영화'가 되고 만다.

대니 보일 감독의 <127 시간> 역시 실화를 영화로 옮긴 작품. 영화 제목인 '127 시간'이란 한 청년이 지옥과 천국을 오간 짧고도 긴 실제 시간을 의미한다.

과연 127시간 동안, 그에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대니 보일 감독은 아주 일상적인, 어떤 아침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협곡 탐험이 취미인 아론(제임스 프랑코)이 지저분한 집에서 눈을 뜬다. 그는 오늘도 여느 휴일처럼 협곡으로 놀러갈 생각에 조금 들떠있다.

능숙하게 간단한 간식거리, 물, 비상용도구 등 산행 준비를 하던 그는 평소에 요긴하게 쓰던 스위스제 '주머니 칼'을 잡으려다가 손이 닿지 않자, 그 옆에 있는 무딘 중국제 칼을 집는다. 그리고 그가 막 문을 나설 때 울리는 전화벨. 엄마의 목소리가 자동 응답기에 담기는 걸 보면서 그는 문을 닫는다.

대니 보일 감독은 그의 아침을 빠르고, 감각적으로 담아낸다. 동시에 관객들이 그 디테일을 모두 기억할 수 있을 만큼 꼼꼼하게 그린다. 왜냐하면 앞으로 찾아올 127시간 동안, 주인공 아론과 관객들은 그 아침의 몇 가지 사소한 실수를 간절하게 곱씹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은 시치미를 뚝 떼고, 아론과 함께 협곡으로 떠난다. 갖가지 형태의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는 협곡 위를 제 집 안방 드나들 듯 누비는 아론의 모습은 경쾌하다.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 아리따운 여인들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처음 협곡 투어에 나선 그녀들에게 아론은 가이드를 자처하고, 지도에는 없는 죽이는 길로 그녀들을 안내한다. 좁은 절벽 사이를 맨 몸으로 버티며 이동하던 끝에, 아론은 갑자기 몸을 지탱하고 있던 손을 놓아버린다. 추락. <127 시간>의 줄거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관객이라면, 일단 기겁하게 된다.

하지만 스크린을 가득 메운 건, 동굴 속 비밀 호수에서 짜릿한 물놀이를 즐기는 이들의 모습.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나 번지 점프 등의 인공적인 놀이시설은 흉내도 못 낼 '진짜 스릴'이 숨어 협곡. 그 맛을 아는 아론이 협곡에 미치지 않을 도리가 없을 듯하다.

협곡의 쾌감을 양껏 자랑한 뒤, 영화는 이제 본론에 들어간다. 여자들과 헤어진 그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협곡으로 향한다. 아래로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지만, 아론의 움직임은 자신만만하다. 앞서 아론의 실력을 본 관객이 안심하려는 찰라, 사고가 생긴다.

아론이 밟은 바위가 미끄러지면서 아론은 바위덩이와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또 한 번의 추락. 이번엔 아무도 웃을 수 없다. 거대한 바위는 협곡 사이에 끼이면서 아론의 오른 팔을 짓이겨 놓았고, 그는 옴쭉달싹할 수 없다. 아무리 소리쳐 봐야 광활한 협곡 그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 지옥의 127시간이 시작된다.

<127 시간>은 감독에게도 꽤 무시무시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협곡에 갇힌 한 남자의 사투는 일종의 '모노 드라마'다. 장소는 오롯이 협곡 틈새뿐이고, 등장인물은 달랑 한 명. 이 단조로운 조건만으로 러닝타임 내내 긴장감을 잃지 않고, 주인공의 감정 변화를 그려내야 한다.

대니 보일 감독은 영화가 1인극을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법을 총동원한다. 주인공 아론이 가져온 비디오 카메라는 그의 '원맨쇼'를 위트있게 보여주는 장치가 되고, 앞서 상세히 설명한 것처럼 '스위스 제 주머니 칼'대신 '중국제 무딘 칼'을 잡는 회상은 관객에게 한숨을 이끌어낸다.

아론에게뿐만 아니라 관객 모두에게 잠시의 허망한 희망을 안기는 아론의 꿈, 그리고 잠시 만난 여인들이 남긴 '파티 약속'에 대한 상상이 아론을, 그리고 관객을 괴롭힌다.

아론과 관객이 이 갑갑한 상황에 지쳐갈 때 즈음, 아론은 마지막 방법을 찾아낸다.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방법이지만, 그 수밖에 없다는 걸 모두 인정하게 된다. 아론은 날이 무딘 칼을 이미 피가 통하지 않아 썩어가는 오른팔에 꽂아 넣는다.

실제로는 장장 3시간이 걸리는 고된 작업이었다는 '탈출의 방법'은 아론 스스로 오른 팔을 잘라내는 것이다. 영화는 아론이 목숨을 살리고자 오른 팔을 포기하는 과정을 3분간, 밀도 있게 그려낸다. 아론의 사투를 바라보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3분을 함께 바라봐야만 기어이 아론이 협곡 밖으로 탈출했을 때, 그 희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대니 보일 감독은 감정적으로 호들갑 떨지 않으면서도 생을 되찾은 순간의 기쁨을 극대화시키는 연출을 선보인다. 앞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모두 날려버리는 행복감이 밀려올 때, 영화는 이 사건의 실제 주인공의 얼굴을 보여준다.

오른 팔이 없이도 여전히 협곡을 누비고 다니는 청년의 환한 미소.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그 희망을 기어코 제 것으로 만들어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눈부시게 빛나는 미소. 대니 보일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건, 3분간의 신체훼손도, 새로운 카메라 워크도, 재치 넘치는 편집 솜씨도 아닌, 그 미소였을 것이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