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코드 선재 '음식남녀' 시리즈 등 4편 모아

영화 <카모메 식당>
어떤 이에게 음식은 단지 살기 위해 먹는 에너지원일 뿐이다. 반면 어떤 이에게는 살아가는 이유 그 자체다. 이 커다란 간극 사이에도 하나의 공통점은 있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바로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심리를 대변해준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음식은 이런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매개체다. 음식은 때론 욕망을 나타내면서 그 갈증을 채워주거나 반대로 갈증을 더하는 심적 공허함의 표상이다.

음식은 또 영화 속에서 자주 소통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음식남녀>나 <바베트의 만찬>은 메마른 일상에서 마음을 닫은 사람들을 다시 소통하게 하는 음식의 위대함을 전면에 내세워 행복의 참 가치를 다시 일깨워준다.

17일까지 씨네코드 선재가 마련한 '음.식.남.녀' 시리즈의 첫 번째 행사 <오기가미 나오코& 이이지마 나미 특별전>은 이런 음식의 특성을 담은 영화 네 편을 모았다. 이이지마 나미는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을 돋게 했던 일본드라마 <심야식당>의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잘 알려져 있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과 이이지마 나미라는 공통분모로 설명되는 영화들은 지친 일상에 잠시 쉼표를 만들어주는 음식의 기능을 기분좋은 여유로 풀어낸다.

# 은 백야의 나라 핀란드 헬싱키에 작은 식당을 차린 일본 여성 사치에의 이야기다. 북유럽 디자인으로 꾸며진 이 카모메 식당에서 그녀가 메인 요리로 내놓는 것은 의외로 소박한 일본 음식인 오니기리(주먹밥). 처음에는 한 달 동안 파리 한 마리 날아들지 않지만, 이윽고 이상한 손님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면서 카모메 식당은 활기를 더해간다. 이후 뭔가 사연이 있는 이 사람들의 정체가 밝혀지는 데는 역시 사치에의 맛깔스런 음식이 한몫을 한다.

뭉친 밥 안에 연어나 매실장아찌, 가다랑어를 넣고 마른 김에 반쯤 싸서 내놓는 오니기리는 사실 요리 같지 않은 요리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엄마의 자리가 비어 있던 사치에를 위해 투박한 손으로 일 년에 두 번씩 오니기리 도시락을 쌌던 아빠의 마음이 담긴 음식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했다는 사실만으로 같은 재료의 음식은 전혀 다른 맛을 낸다. 오랜 시간 손맛이라 느꼈던 그 맛의 비법은 알고 보면 마음의 맛인 것이다.

# <카모메 식당>이 핀란드에서 꿈꾸는 새로운 삶의 이야기라면, <안경>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휴식에 대한 동경과 부적응을 다룬 영화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쉬는 것은 모든 현대인들의 꿈이다. 영화 속 타에코 역시 그래서 남쪽 바닷가의 조그만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보여준 이상한 행동에 타에코는 적응하기 힘들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사쿠라 씨의 팥빙수다.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과 정성으로 만든 팥과 그릇 한가득 소복히 쌓인 얼음, 이렇게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맛의 군더더기를 빼서 조화를 이룬 팥빙수의 맛에는 묵직한 삶의 감동이 묻어난다.

# 오기가미 나오코와 이이지마 나미, 그리고 나오코 감독의 뮤즈라고 할 수 있는 '무뚝뚝한 아줌마' 모타이 마사코가 다시 호흡을 맞춘 <토일렛>은 미국의 한 마을에서 일본인 할머니와 갑자기 불편한 동거를 시작하게 된 세 미국 청년들의 이야기다. 이들을 연결하는 끈이었던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이들 사이엔 어쩔 수 없이 커다란 벽이 있다.

영화 <안경>의 팥빙수
하지만 소통하고자 노력하는 손주들의 마음이 할머니에게 전해지면서 그녀는 이들을 위해 직접 교자(만두)를 빚는다. 소를 꽉 채워 넣은 교자가 기름 두른 팬 위에서 요란하게 익어가는 소리는 기묘한 네 가족 사이에 머물던 정적을 비집고 들어간다. 비로소 입의 언어가 아닌, 눈과 마음의 언어로 소통의 물꼬가 튼 순간, 가운데 놓인 것은 소박하기 짝이 없는 교자다.

# 이번 기획전 중 이이지마 나미가 유일하게 다른 감독(오키타 슈이치)과 호흡을 맞춘 <남극의 쉐프>는 해발 3,810m, 평균기온 -54℃의 극한지인 남극 돔 후지 기지에서 8명의 남자 대원들의 생활을 음식을 통해 그려낸다.

기상학자, 빙하학자, 빙하팀원, 차량담당, 대기학자, 통신 담당, 의료 담당 등 다양한 인력이 있지만 여기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조리 담당인 니시무라다. 보이는 것이라곤 새하얀 설원밖에 없는 남극에서 유일한 낙이라곤 '남극의 쉐프'인 니시무라의 요리를 먹는 것이기 때문.

평범한 일본 가정식에서부터 호화로운 만찬까지 다양한 메뉴가 있지만, 이들의 '훼이버릿' 메뉴는 뭐니뭐니해도 '미소라면'. 오랜만에 나타난 오로라 관측도 포기할 만큼 오랜만에 식탁에 올라온 따뜻한 미소라면 한 그릇은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대원들의 마음을 다정하게 위로해준다.

네 편의 영화에서 다시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핀란드, 미국, 남극 등 장소는 달라도 일상적인 공간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이 음식들의 출처는 분명히 일본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음식은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가 말한 것처럼 한 인간이나 도시, 나라를 대변하는 문화의 집약체라고 하는 모양이다.

영화 <토일렛>의 교자

영화 <남극의 쉐프>의 미소라멘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