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암기념관 특별전 '검여 유희강-칼처럼 돌처럼'

유희강 작, 의춘백록(宜春白鹿), 1975년, 종이에 먹·채색
20세기 한국 서예를 대표하는 두 거장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추사(秋史) 김정희 이래 최고의 서예가로 꼽히는 검여(劍如) 유희강(1911~1976)과 소암(素菴) 현중화(1907~1997)의 대표작들을 선보이는 제주도 소암기념관 개관 5주년 특별전에서다.

'서귀소옹과 20세기 서화거장' 두 번째 시리즈로 마련된 '검여 유의강-칼처럼 돌처럼'전에는 검여의 서예작품은 물론 타계직전에 집중적으로 제작한 무고(撫古)와 묵희(墨戱) 시리즈작품 등 40여점과 소암의 전예와 해, 행초 시기별 대표작품 20여점 등 총 70여점이 전시된다.

검여의 전시작품으로는 '의춘백록(宜春白鹿)' '백수진공(百獸震恐)' '종정문(鐘鼎文)' '관어도(觀魚圖)' '계축묵희' '양소백의 칠언대련' '가모치복(嘉謩致福)' 등이 있고, 소암의 주요작품에는 '부휴선사(浮休禪師)' '산거잡영(山居雜詠)' '소동파(蘇東坡) 증동림총장로(贈東林總長老)' '정여농공(政如農功)' '백사불관심독정(百事不關心獨靜)' 등이 눈길을 끈다.

동시대를 대표하는 두 거장이 한 자리에서 만난 데는 이들의 특별한 인연도 한몫한다.

검여와 소암은 일제 강점기 시대 각각 중국과 일본으로 유학해 동아시아 서예의 주류 서풍(書風)이었던 육조해(六朝楷)를 서예토대로 닦았다. 또한 귀국 후 60~70년대에 국전(國展)을 통해 같이 자기세계를 형성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중앙이 아닌 지역에서 활동영역을 넓혔다는 점도 유사하다.

유희강 작, 계축묵희 첩 부분, 1973년, 종이에 먹
그러면서도 검여는 강한 골기와 거친 갈필에서 나오는 웅건하고 분방한 기운의 필획을 구사했고, 소암은 탈속의 필획 속에서도 왕법의 정통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0월4일부터 11월11일까지 열리는 이번 특별전은 다분히 소암이 검여를 초대한 모양을 띠고 있다. 검여의 작품이 주를 이루는 것이나 전시 구성에서 검여를 배려한 점 등이 그러하다.

검여는 초창기 한학(漢學) 중심의 가학(家學)을 통해 서예의 토대가 되는 한자와 한시, 붓글씨를 자연스럽게 수련한 뒤 중국 유학(1938~1946)을 통해 육조해 중심의 금석기운의 필획과 회화적인 공간구성의 서예세계를 열었다.

검여는 귀국후 다양한 비첩(碑帖) 연마를 통해 특유의 서풍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국전(國展)을 통해 서예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이 시기에 송대 황정견과 소동파, 청대 등완백, 조지겸, 오창석, 조선말기 추사 김정희 등 시대와 인물을 달리하며 전예는 물론 육조해 중심의 해서와 행서, 문인화 등 여러 가지 서체와 장르를 학습하면서 궁극에는 육조해 중심의 검여 서예를 형성했다.

검여는 50대 후반 서예가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인 우반신 불수의 중풍으로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됐으나 불굴의 예술혼으로 극복, 일체의 기교나 속기를 배제한 좌수서(左手書)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검여 특유의 회화적인 공간 구성이 종전 갈필의 금석기운과 배합되면서 동시대 여타작가와도 구분되는 '검여색(劍如色)'으로 완성된 것. 이 시기에 만들어진 '계축묵희(癸丑墨戱)'는 서예와 미술의 격이 없는 만남이라는 노년기 검여 예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유희강 작, 종정문(鐘鼎文) '석자손부신유(析子孫父辛_)', 1973년, 종이에 먹
검여의 예술세계를 헤아릴 때 삼여(三如) 즉, 검처럼 날카롭고(劍如), 돌처럼 단단하고(石如), 박처럼 둥근(瓢如) 글씨의 세계가 일컬어진다. 이 세 가지의 경지는 검여의 인생과 예술을 요약한다.

평론가 이경성은 검여에 대해 외유내강의 인간상과 선인의 기술과 예지 위에 자기의 개성을 구축한 예술가상을 겸비한 시대의 거봉이라고 평했다. 시인 고은은 "검여 유희강 선생이 못내 그립다. 그 이는 이 땅의 문자향(文字香)이다"고 회고 하기도 했다.

이번 검여ㆍ소암 특별전은 두 거장의 독특한 예술세계와 함께 남다른 삶을 되새겨볼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오는 11월8일 소암기념관 세미나실에서는 '소암ㆍ검여의 존재가 20세기 한국서예에 끼친 영향과 특질'을 주제로 한 세미나도 열린다. 문의 760-3511.


현중화 작, 백사불관심독정(百事不關心獨靜), 종이에 먹

박종진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