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 이대로 가야 하나자극적이고 기상천외한 줄거리 시청자들 욕하면서도 보고 또 보고…배우들도 감정 연기 몰입에 애로… 밀도 있는'착한 드라마' 확산돼야

막장은 갱도의 막다른 곳을 뜻한다. 어느 날부터 드라마 속 극단적인 상황을 '막장'이라 칭하게 되면서, 밑바닥을 의미하는 단어가 됐다. 개연성이 결여되고 무리한 설정이 난무하는 드라마를 통상 '막장 드라마'(줄여서 막드)라 부른다. 자극적이기 때문에 보는 재미는 있다. 맛있지만 유해한 불량식품처럼 말이다. 일일극을 점령한 그들, '막드'에 대해 살펴봤다.

▲ 아침부터 저녁까지, '막드'의 습격

SBS 아침 일일극 '나만의 당신'에선 당하기만 하는 여주인공이 등장하고, KBS 1TV 저녁 일일극 '사랑은 노래를 타고'에서는 남주인공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여주인공의 아버지가 그의 생물학적인 아버지라는 기상천외한 전개가 이뤄진다. 지난 3일 첫 방송된 KBS 2TV 저녁 일일극 '뻐꾸기 둥지'에는 불임인 여주인공에게 이혼 혹은 첩을 종용하는 시어머니가 등장한다. 여주인공이 결국 대리모를 선택하게 되는 이유다.

오늘날 일일극의 풍경은 이와 같다. 출생의 비밀과 재벌 2세, 혹은 '상무님'이나 '본부장님'은 기본이다. 그들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는 평범한 일상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일 때가 많다. 그것이 치밀하게 그려지기보다는, 답답한 상황이 반복되거나 극단적인 해결로 마무리된다. 허술한 전개와 우연성 남발. 애청자들이 분통을 터트리는 이유다.

줄거리가 엉성하다 보니, 당초 알려진 이야기와 다른 방향으로 흐를 때도 있다. 여주인공의 복수극인 줄 알았던 KBS 2TV 저녁 일일극 '천상여자'. 지난 2일 103회로 종영하기까지 '천상여자'는 사실상 남주인공의 악행일기였다. MBC 저녁 일일극 '빛나는 로맨스'나 지난해 방송된 MBC 저녁 일일극 '오로라 공주'는 중도 투입된 남자 배우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 기존 남주인공이 존재감을 잃었다.

▲ 배우들의 고충은 없을까

드라마가 우왕좌왕하면, 캐릭터도 제 갈 길을 잃는다. 길게는 7~8개월에 걸쳐 한 인물로 살아가는 배우들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스스로 이해되지 않는 대본을 쥐어진 배우들의 절망감은 상당하다. 본인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시청자들에게 이해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무리한 전개로 빈축을 샀던 '오로라 공주'에 출연했던 익명을 요구한 한 신인배우는 "대본을 받고 한숨이 나올 때도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않나"고 푸념하기도 했다. 박정철은 <주간한국>과 인터뷰에서 이른바 '막드'에 대한 질문에 "배우들도 고민이 많다. 손쉽게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나 감정을 어떻게 연기적으로 풀어야 하는지 배우들끼리 이야기할 때가 많다. 어떻게 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럴 땐 함께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합의점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는 배우 박동빈이 출연했다. 그는 MBC 아침 일일극 '사랑했나봐'를 통해 '주스아저씨'란 별명을 얻었다. 극 중에서 마셨던 주스를 뱉는 것으로 놀라움을 표현했고, 그 모습이 실소를 안겼기 때문이다. 이후 예능프로그램에서 숱하게 패러디됐는데, 일일극의 특징인 과장된 감정 표현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 '막드'도 장르다 vs 시청률 지상주의 폐해

완성도 낮은 드라마가 쏟아지는 데 대해 일부 제작진은 "'막드'도 장르"라고 말한다. 장서희는 지난 달 29일 열린 '뻐꾸기 둥지' 제작발표회에서 "'막장'이란 소재가 요즘은 하나의 장르가 된 것 같다. 이왕이면 '막장'보다는 극성이 강한 드라마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한 방송계 관계자는 <주간한국>에 "모든 드라마가 천편일률적으로 '막드'라면 다양성의 문제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크게 지탄받을 일은 아니지 않나"고 말했다.

일각에선 시청률 지상주의의 폐해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임성한과 김순옥은 사랑과 논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대표적인 스타 작가들이다. 임성한 작가는 '오로라 공주'를 비롯, '보고 또 보고' '인어아가씨''왕꽃 선녀님' '신기생뎐' 등 파격적인 소재로 끊임없이 화제를 모으고, 김순옥 작가는 '아내의 유혹' '천사의 유혹' 등으로 복수극의 대명사가 됐다. 황당한 전개와 설정으로 시청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대부분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방송사가 이들을 꾸준히 찾는 이유다.

구조적인 원인도 간과할 수 없다. 수십억의 제작비가 책정된 미니시리즈에 비해 일일극은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이 주어진다. 그 가운데 시청률 경쟁을 벌여야 한다. 케이블채널과 종합편성채널 등 경쟁자들도 늘어났다. "제작진도 웰메이드 드라마에 대한 갈증이 있다. 비교적 실험적인 시도가 가능한 단막극에 애정을 기울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 시간과 비용 등 현실적인 여건이 그렇지 못하다. 시청자들의 이목을 쉽게 사로잡을 수 있는 선정적인 소재에 눈길이 가게 된다"고 방송 관계자는 말한다.

▲ 일일극 하향 평준화, 해결방안은 없나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지상파 3사의 일일극은 최근 케이블채널과 종합편성채널의 약진과 대비된다. '예능형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케이블채널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연상연하 커플의 불륜'이란 소재를 택했지만 섬세한 연출로 밀도 있게 그려낸 종합편성채널 JTBC 드라마 '밀회' 등이 좋은 예다. 케이블채널과 종편이 끊임없이 도전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사이 지상파는 뒤처지고 만 셈이다.

책임을 묻는다면 원인은 다양하다. 책임질 사람도 찾기 힘들다. 지난해 '오로라 공주'가 막무가내로 출연진을 하차시키고 "암세포도 생명이다"라는 대사들을 만들어 냈지만 해명하는 이는 없었다. 전파를 내준 MBC는 외주 제작사의 소관이라고 수수방관했고, 드라마를 만든 임성한 작가와 외주 제작사는 입을 다물었다. '발암 드라마'(보는 사람의 짜증을 넘어 질환까지 유발할 것 같은 드라마) '쓰라마'(쓰레기+드라마)라 질타하면서도 즐겨보는 시청자가 있었다.

김영섭 SBS 드라마 국장은 지난 28일 저녁 일일극 '사랑만 할래' 제작발표회에서 '막장' 소재를 최대한 배제하겠다고 발언했다. 실제 '사랑만 할래'는 가능성이 보이는 젊은 배우들을 캐스팅해 그들의 풋풋한 로맨스로 채웠다. 전작인 '잘 키운 딸 하나' 역시 착한 드라마라는 호평을 받았다. 시청률로 보답받진 못했지만 '일일극=막드'라는 인식이 만연한 요즘, 이들의 소신 있는 행보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막드'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범람하는 '막드'로 결국 피해를 보는 것도 시청자다. 비슷한 '막드' 사이에서 선택권을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콘텐츠의 경쟁력 약화로, 한류 열풍의 악재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김윤지기자 jay@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