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상여자' 종방자신 야망위해 온갖 악행 저질러 분노 가득한 표정 고함소리까지하루라도 마음 편한 날이 없어 6개월동안 체중 3~4kg 빠져모든 열정 불태워… 이젠 후련해

지난 2일 종방한 KBS 2TV 일일극 '천상여자'(극본 이혜선ㆍ연출 어수선). 20%대 시청률을 넘나들며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당초 한 여인의 복수극으로 알려졌지만, 실질적으로 드라마를 이끌고 간 이는 악역인 장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살인을 포함한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극이 전개될수록 악행의 강도가 높아졌다. 장태정 역을 맡은 배우 박정철의 마음도 편할 날이 없었다.

"6개월 동안 3~4kg의 체중이 감량됐어요. 입맛이 떨어져 거의 먹지 않았거든요. 처음 장태정 역을 제안받았을 땐 만만하게 생각했어요. 어느 순간 극도로 예민해진 저를 발견했죠. 예상보다 강했어요. 장태정이 숨 쉴 틈도 안 줬거든요."

실제 박정철은 까다로운 연예인보다는 털털한 배우에 가까운 인상이다. 우연히 만나는 시청자들도 그를 보면 첫 마디가 "실제로 보니 인상이 선하다"는 말이란다. SBS 예능프로그램 '정글의 법칙'시리즈에서 보여준 대로 수더분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인터뷰 중 쉼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을 만큼 수다쟁이이며, "악역 연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털어놓을 만큼 솔직했다.

작품에서만은 달랐다. 푸근한 미소를 지웠다. 보는 이의 안면 근육이 욱신거릴 만큼 분노가 가득한 표정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봤다. 빈번하게 고함을 질러 목도 자주 아팠다. 어깨는 늘 뭉쳐 있었다. 주 6일, 그것도 6개월 동안 극한의 감정을 쏟아낸 통에 그는 촬영장에서 항상 기진맥진한 상태였단다. 외롭고 고독했다.

그는 '정글의 법칙' 출연자로 다섯 차례나 오지를 다녀왔다. '천상여자'와 '정글의 법칙' 중 어느 쪽이 더 힘들었는지 묻자 "당연히 '천상여자'"란 답이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육체적으론 오지 생활이 힘들지만, 감정적인 소모는 없다고 설명했다. "드라마와 비교할 게 못 된다. 게다가 '정글의 법칙'은 길어야 3주 촬영이다. 끝이 보이니까 희망이 생긴다"고 덧붙였다.

드라마 현장이 차디찬 냉탕이었다면, 아내가 있는 집은 몸을 녹일 수 있는 온탕이었다. 그는 드라마가 방영 중인 지난 4월 12일 8세 연하의 승무원과 웨딩마치를 울렸다. 결혼 이후 차이점을 물으니 "분명히 다르다"고 답했다. 고된 녹화를 마치고 돌아간 집에서 곤히 잠든 아내의 얼굴만 봐도 기운이 난다고 했다. "스스로 다독이게 된다. 방전된 배터리가 충전되는 기분"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신혼여행을 미루는 것을 이해해주고, 묵묵히 내조해주는 아내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이 듬뿍 묻어났다.

"'천상여자'를 촬영하는 기간 동안 행복과 고통을 함께 느꼈어요. 결혼해서 가장 행복하기도 했고, 악역을 맡아 매우 고통스럽기도 했어요. 이랬던 적은 처음이에요. 그만큼 아팠지만 의미 있는 시간 같아요. 잘했든 못했든, 열정을 몽땅 불태운 것은 사실이니까요. 누구한테도 떳떳해요."

결말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다. 그는 장태정이 절대적인 악인으로 마지막까지 남아있길 바랐다. 여러 가지 여건상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동안 철저한 악을 표현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냈던 그다. 장태정이 막바지에서 참회한다는 전개가 그로선 아쉬웠다. 그는 "장태정은 악행으론 역대 일일극 악역 3위 안에는 들 것"이라 자부(?)하며 "장태정은 훗날에도 평범하게 살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철을 포함해 윤소이 권율 등 동료 배우들이 열연을 펼쳤지만, '천상여자'는 완성도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익숙한 복수극이란 지적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드라마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다. 어쨌든 시청자가 드라마를 즐기셨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윽고 "연기로서는 제 모든 것을 쏟아내 후련한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완벽에 가깝게 악한 역할은 처음 해봤어요. 나름대로 도전이었죠. 잘 해냈다는 것보다 잘 이겨냈다는 기분이에요. 어느 순간 캐릭터가 느끼는 감정들을 저도 느끼면서 괴로웠어요. 장태정이 극한에 몰리니 저 역시 장태정을 궁지로 모는 역을 맡은 동료 배우들과 말 섞는 것조차 힘들더라고요. 캐릭터와 일체감을 느낀 게 처음이 아니지만 이렇게 깊이 빠진 건 처음 같아요. 진심으로 웃은 날이 결혼식 날밖에 없어요."

그에게 차기작을 물으니 신혼의 단꿈에 빠지고 싶다고 했다. 이달 중 아내와 하와이로 뒤늦은 신혼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내친김에 자녀 계획을 물었다. 두세 명 정도면 좋겠다고 했다. 어린 나이가 아니니 빨리 아기가 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신혼을 더 즐기고 싶다고 했다"며 "올해는 넘길 것 같다"고 웃었다.

아내에 대한 이야기에 연신 웃기만 하는 그에게서 더 이상 장태정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가득한 박정철로 이미 돌아온 듯했다.



김윤지기자 jay@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