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한살, 내 인생에도 봄날이…데뷔 첫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깜짝 수상20년 연기생활 대쪽 열정으로 살아온 결과"이번엔 악녀 아닌 정숙한 현모양처로 나와요"

화려한 외모 뒤에 가려진 단단한 내공이 느껴졌다. 최근 개봉된 영화 '봄'(감독 조근현, 제작 스튜디오 후크)으로 마드리드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다시 조명받고 있는 배우 김서형. 개봉 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배우로서 자부심과 연기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대쪽 같은 대나무를 연상시켰다. 영화 속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병으로 죽어가는 조각가 남편 준구(박용우)를 성심성의껏 내조하는 조강지처 정숙이 스크린 밖으로 잠시 외출을 나온 듯했다. 악다구니를 써대던 '아내의 유혹'의 악녀 신애리의 잔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20여년 가까이 대중들이 알아주든 말든 성실히 한 길을 걸어온 배우 김서형만이 존재했다.

20년 연기생활의 훈장? 첫 여우주연상

국내에서 몰라주니 해외에서 먼저 알아봤다. '아내의 유혹'으로 SBS 연기대상에서 우수연기상을 수상한 게 유일한 수상경력인 김서형은 영화 '봄'으로 데뷔 후 최초로 국내 영화제에서 못 받아본 여우주연상을 지난 7월 마드리드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사랑하는 남편의 마지막 순간에 희망을 주기 위해 누드모델을 구해준 후 겪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김서형의 탁월한 연기력은 수상의 이유를 확실히 짐작케 한다. 축하인사를 건네자 수줍게 미소를 지은 김서형은 "영화 '봄'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나에게 가장 큰 상이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사실 지난해 여름에 찍었어요. 솔직히 저예산 영화고 언제 개봉할지 모르는 상황여서 사실 잊고 지냈어요. 마드리드국제영화제에 참석했을 땐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갑자기 제 이름이 불려 수상이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왜 나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돌아오고 나서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야 그 기쁨이 확실히 느껴졌어요. . '봄'은 저에게 정말 선물 같은 영화였어요. 영화 촬영 전 슬럼프에 빠져 있는 상태였거든요. 배우로서 정체기였던 거 같아요. 한 달 동안 아름다운 현장에서 마음을 비우고 정숙 역에 몰입하다보니 고민도 사라지고 저절로 힐링이 돼더라고요. 배우로서 에너지가 바닥난 거 같은 기분이 들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받은 느낌이었어요. 그 때문에 '기황후'와 '개과천선'을 잇달아 촬영했지만 평소보다 더 수월하게 연기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악녀와 현모양처 사이

'봄'에서 김서형이 연기한 정숙은 말 그대로 현모양처다.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기보다 눈빛만으로 화면을 장악하는 김서형의 절제된 내면연기는 '명불허전'이란 말을 실감케 한다. 비중은 누드모델로 나오는 민경(이유영)보다 작지만 그 존재감은 어마어마하다. 평소 한없이 내지르기만 했던 '아내의 유혹'이나 '기황후' '샐러리맨 초한지'의 악녀 모습들과 천지차이여서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김서형은 "연기변신에 성공했다"는 찬사를 건네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색깔은 다르지만 이런 '외유내강' 캐릭터는 이미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정숙처럼 이렇게 대놓고 현모양처는 처음이지만 지적인 여성을 예전에도 몇 번 연기한 적이 있어요. 조명을 받는 캐릭터가 아니여서 그렇지.(웃음) '자이언트'의 유경옥이 대표적이죠.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내뱉기보다 안으로 삭이는 강인한 여자였어요. 사실 정숙이 준구와 민경을 질투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건 사실 잘 이해되지 않았어요. 감독님에게 물으니 '원래 조각가 아내들은 모델을 피사체로만 본다'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그 말도 맞겠지만 모든 걸 감내하게 한 건 남편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생각해요. 영화를 본 지인들이 '아내의 유혹' 김서형이 연기하니 언제 상을 뒤엎고 머리채를 잡을까 조마조마하며 지켜봤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남편이 곧 죽을 거라는 걸 의사한테 통보받는 장면을 찍을 때는 맘이 넘 아프다보니 눈물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제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넘 슬프니까 오히려 눈물이 안 나오더라고요. 정숙이 소리 내 울 수도 없고 그 모든 감정을 안으로 삭이는데 가슴으로 울었다는 말이 실감이 나더라고요."

40대 여배우로 살아간다는 건

해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김서형의 삶은 변한 것이 전혀 없다. 남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화계와 방송가에서 40대 여배우가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이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이다. 아줌마가 아닌 여자의 느낌을 지닌 김서형에겐 더욱 혹독하다. 최근에도 한 작품의 물망에 올랐다가 실망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는 배우 생활을 시작한 후 여러 번 반복되는 일이다. 많이 초연해졌지만 마음이 여전히 쓰린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영화 '봄'을 통해 경험하게 된 내려놓음의 미학으로 인해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

"왜 전 한 작품으로 주목받은 후 다음 작품으로 이어지는 게 이렇게 힘들까요?(초월한 웃음) 꼭 주연을 하겠다 유명 감독 작품을 하겠다 하는 욕심도 없는데 작품을 잡는 게 정말 힘드네요. 이제 정말 제대로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말이죠. 정말 우리나라에 능력 있고 뛰어난 40대 여배우들이 많은데 작가님과 감독님들이 제대로 능력발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셨으면 좋겠어요. 차기작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요. 최근 소속사도 옮겼으니 다시 한번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출발하려고 해요. 이렇게 열심히 하다보면 기회가 또 오겠죠 뭐. '봄'이 나에게 찾아왔던 것처럼 말이죠. '봄'을 통해 느낀 감정이나 열정은 앞으로 내 연기인생의 자양분이 될 거 같아요."



최재욱기자 jwch6@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