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평범한 일상도 멜로로 만들 만한 분위기였다. SF 액션 영화 ‘인랑’(감독 김지운, 제작 루이스픽쳐스) 개봉 직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한효주는 맹위를 떨치는 폭염 속에서도 가을을 불러들이는 미모로 기자를 맞이했다. 거친 남자들의 액션이 넘치는 영화의 장르를 멜로로 바꿔 버린 장본인의 아우라가 곧장 느껴졌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동명 걸작 애니메이션을 영화화한 ‘인랑’은 남북한이 통일준비 5개년 계획을 선포한 후 반통일 테러단체가 등장한 혼돈의 2029년, 경찰조직 ‘특기대’와 정보기관인 ‘공안부’ 간의 숨막히는 대결 속에서 ‘인랑’으로 불린 인간병기 임중경(강동원)의 활약을 그린 작품. 한효주는 임중경을 인간적인 고민 속에 빠트리는 베일에 싸인 이윤희 역을 맡아 다채로운 매력을 뿜어낸다. 배우로서 치열한 고민의 연속인 한효주의 속내를 들어보았다.

#거장의 부름

한효주가 ‘인랑’을 선택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김지운 감독이었다. 남자배우들의 세상이나 마찬가지인 충무로에서 30대 초반 주연급 여자배우가 소위 ‘거장’으로 불리는 감독들의 러브콜을 받는다는 건 매우 드문 일. 매 영화 평단과 관객의 지지를 고루 받는 김지운 감독의 부름에 한효주는 버선발로 뛰어나가는 심정으로 출연을 결정했다.

“평소에 김지운 감독님을 정말 좋아했어요. 매 영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시는 게 정말 멋졌어요. 장르가 한 편도 겹치지 않는 게 신기했죠. 그 중 ‘밀정’과 ‘장화, 홍련’을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장르는 다르지만 매 작품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하신 게 정말 존경스러워요.”

이윤희는 여러 겹의 가면을 쓰고 있기에 연기하게 매우 복잡하면서 까다로운 캐릭터. 인간병기 임중경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긴 소녀의 언니로 다가가 마음을 흔들지만 예상대로 다른 목적을 지닌 인물이다.

“이제까지 한 역할 중에서 가장 어려운 캐릭터였어요. 일종의 스파이기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데 표현해야 할 게 무척 많았죠. 감정적으로. 한 가지 결만 살리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 다른 모습을 끄집어내야 했어요. 그걸 조절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러나 배우로서 할 일이 많기에 연기를 하는 재미는 분명히 있었어요.”

이윤희는 요즘 영화 여주인공 트렌드와는 다른 다소 수동적인 캐릭터. 자신이 직접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게 아니라 남자에게 의존해 위기를 극복한다. 여자배우로서 아쉬움이 있을 법하다.

“여전사 캐릭터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이 영화를 하게 된 건 온전히 김지운 감독님 때문이에요. 감독님을 믿고 모든 걸 맡겼어요. 감독님이 만들어준 세계에 풍덩 빠져 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 의견을 내지 못한 게 아쉽긴 해요. 그러나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고 후회는 없어요.”

#30대 여배우로 살아가기

어린 나이에 데뷔해 연차가 상당하지만 한효주는 이제 겨우 한국나이로 서른둘.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는 그는 1년 가까이 진행된 ‘인랑’ 촬영을 마친 후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삶을 새로 세팅하고 있다.

“나이 드는 것에 거부감은 없는데 지금 이 나이는 좀 혼란스러운 시기인 것 같아요. 완전히 어린 것도 아니고 나이 든 것도 아니잖아요. 배우로서 어떤 길을 가야 하나 고민이 많아요. 사실 여자배우가 할 만한 시나리오가 많지 않고 마냥 기다릴 수만 없으니 초조하죠. 이제까지 다작을 하는 배우는 아니었지만 정말 쉬지 않고 달려왔어요. 작품과 작품 사이 쉬는 기간에도 다음 작품을 고민해야 했기에 늘 부담이 있었어요. 차기작을 정하지 않고 이렇게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 건 거의 처음인데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드네요. 이런 고민을 친한 언니에게 말했더니 ‘Welcome to thirty(30대 들어온 걸 환영해)’라며 30대 여성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라고 말씀하더라고요. 알차게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한효주의 요즘 최대 고민 중 하나는 어떻게 재미있게 노느냐다. 모범생처럼 십여년 일만 해왔기에 주위에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재미있게 노는 법도 잘 모른다. 특별한 취미도 없다.

“쉴 때 제가 하는 일은 여행을 가거나 맛집을 찾아 다니는 게 다였어요. 그러나 이제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 전혀 안 해본 걸 해보고 싶어요. 킥복싱을 배우려고 하는데 몸을 쓰면서 새로운 감각 익히면 좋을 듯해요. 나중에 액션 연기를 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제가 여성스러운 면이 많을 걸로 아는데 사실 덜렁거리고 털털한 면이 많답니다.”

한효주는 배우로서 해외진출에 대한 욕심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14년 일본 영화 ‘서툴지만, 사랑’에 출연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가서라도 좋은 감독님과 일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일본 영화도 제가 직접 문을 두드려 출연하게 된 거였죠.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더라도 조금씩 천천히 노력해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언어공부를 열심해 해야겠죠. ‘인랑’에 함께 출연한 강동원 선배님이 할리우드에 가신다고 하는데 길을 잘 닦아 놓아주셨으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후배들이 잘 따라가게.(웃음)”

최재욱 스포츠한국 기자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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