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멋대로 헝클어진 노란 머리, 자유분방한 민낯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영화 ‘세 자매’(감독 이승원)의 장윤주가 그 주인공이다. 화려한 런웨이의 톱모델은 온데간데없다. 세 자매의 골칫덩어리 막내, 미옥만 보일 뿐이다. 2015년 ‘베테랑’(감독 류승완)의 미스봉으로 영화계를 들썩인 모델 장윤주가 다시 한번 스크린을 두드린다. 오는 27일 개봉하는 ‘세 자매’는 완벽한 척하는 둘째 미연(문소리), 괜찮은 척하는 첫째 희숙(김선영), 안 취한 척하는 셋째 미옥(장윤주)까지, 같이 자랐지만 너무 다른 개성을 가진 세 자매의 이야기를 그린다.

장윤주. 에스팀엔터테인먼트

“‘베테랑’ 이후 결혼하고 출산하면서 한 2년 쉬었어요. 그 사이 제안받은 작품들은 있었지만 ‘계속 연기를 해도 될까’ 하는 고민이 깊어 선택하기 어려웠죠. 제가 결정을 내리면 불도저 같지만 결정하기까지 굉장히 신중한 성격이거든요. 그러다 만난 ‘세자매’는 출연 결심까지 한 달 정도 걸렸어요. 정말 잘 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했어요. 결정한 이후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시작하기로 했어요. 그래야 미옥을 진실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기존 이미지를 다 내려놓는 게 첫 번째 숙제였죠.”

장윤주가 연기한 미옥은 슬럼프에 빠진 극작가로 늘 술에 취해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남편과 의붓아들을 당황케 한다. 아내이자 엄마로서 잘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자꾸 실수를 반복하고 일은 꼬여만 간다.

“미옥은 기억이 주는 폭력에 휩쓸려 사는 인물이에요. 무의식 속 상처가 있죠. 살다보면 언젠가 좀 화나고 아픈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잘 생각이 안 나는 기억들이 있잖아요. 어렸을 때 받은 상처는 성인이 돼도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는 것 같아요. 미옥이 자존감이 낮고 스스로를 쓰레기라 여긴 것도 어린 시절의 아픔이 지배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 걸 보면서 나도 우리 딸한테 혹시 정서적으로 작은 상처라도 준 적 없는지 더 깊게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장윤주는 사고뭉치 미옥을 완벽하게 그리기 위해 외모부터 과감한 변신에 도전했다.

탈색머리에 후줄근한 티셔츠, 민낯, 거친 입담으로 날마다 술과 함께하는 캐릭터에 착 붙는 생활 연기를 선보였다.

“처음 출연을 두고 고민할 때 옆에서 지켜보던 친한 친구가 ‘탈색하면 어떨까?’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옥의 메이크오버가 되면서 바로 캐릭터를 만난 기분이었어요. 패션업계에 오래 있었으니까 이미지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죠. 특히 미옥이 가장 자주 입는 노란 점퍼는 직접 쇼핑해서 구입했어요.”

‘세 자매’의 세 여인들은 겉으로 아무 문제없어 보이지만, 풀지 못한 기억의 매듭과 각자의 아픔을 숨긴 채 살아간다. 실제로 세 자매 중 막내로 자란 장윤주 역시 영화 촬영 내내 가족들을 떠올렸다. 무엇보다 언니들과 다투고 화해하며 겪은 감정들을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녹여내기도 했다.

“후반부에 식당에서 둘째 언니가 모든 걸 터트리는 걸 보고 미옥이 뒤에서 우는 장면이 있어요. 그 장면을 찍는데 언니가 생각났어요. 저희 큰 언니도 좀 답답한 면이 있어요. 항상 삭히고 살아요. 저는 막 지르는 스타일이라 성향이 다르죠. 언젠가 어른이 되고 나서 언니랑 싸웠어요. 제가 ‘분출 좀 하고 살아’ 이랬더니, 언니가 ‘나라고 욕 못 하는 줄 알아?’라면서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그런 모습은 처음 봐서 너무 놀랐고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서 1시간을 울었던 적이 있어요. 이틀 후에 언니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촬영할 때 그 감정을 많이 떠올렸죠.”

막내로 사랑받고 자란 장윤주는 최근 몇 년간 새로운 가족을 얻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2015년 4살 연하의 사업가와 결혼하면서 2017년 첫 딸 리사 양을 낳았고 아내이자 엄마로서 인생의 새로운 출발선상에 섰다. tvN ‘신혼일기2’에서는 소탈한 일상과 다정다감한 남편을 공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미옥이 아이한테 잘하고 싶어 하고 엄마의 역할에 대해 궁금해 하잖아요. 엄마가 되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나 봐요. 저도 그랬거든요. 근데 아직도 모르겠어요. 우리 딸한테 어떤 엄마인지. 딸이 주는 행복과 기쁨이 정말 큰데 저도 일하는 엄마라 아이가 너무 어릴 때부터 ‘엄마 오늘 일 있어’ 이 얘기를 많이 했어요. 사과도 많이 해요. ‘아까 소리 질러서 미안해’ 이런 거요. 마음이 아플 때가 많죠. 그래도 재밌는 엄마인 것 같아요. 혼낼 땐 혼내지만 제가 무슨 얘기만 하면 딸이 그렇게 웃어요. 딸한테는 제가 인생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힘이 되는 멘토였으면 좋겠어요. 남편한테는 갖고 싶은 아내이고 싶어요.(웃음) 지금처럼 사랑받는 아내이자 남편을 사랑해주는 아내로 살았으면 해요.”

1997년 패션계에 데뷔한 장윤주는 동양적인 이미지와 완벽한 보디라인으로 세계적인 톱모델로 활약했다. 최고의 모델로 오랜 기간 사랑받은 그는 ‘베테랑’의 터프한 여형사 미스봉으로 성공적인 스크린 데뷔를 치렀고, 두 번째 작품인 ‘세 자매’로 또 한 번 배우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시민 덕희’(감독 박영주), ‘1승’(감독 신연식) 등 차기작들도 줄줄이 개봉을 앞뒀다. 그는 “앞으로도 신을 훔칠 생각이다”라며 유쾌하게 웃었다.

“어릴 때부터 프로페셔널하게 일을 해서 그런지 일하는 걸 좋아해요. 제 감각과 실력을 총동원해서 뭔가 표현하고 좋은 결과물이 나올 때 즐거워요. 한동안 연기에 확신이 없었는데 ‘세 자매’를 통해서 계속 연기를 해도 괜찮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어떤 역할이든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연기할 거예요. 기대해주세요.”



조은애 스포츠한국 기자 eun@sportshankook.c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