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사회 에스닉 미디어2004년 설립 열악한 상황에도 '자기 목소리 내기' '편견 깨기' 앞장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흑인 오바마 후보의 당선은 미국 다문화사회의 승리인 동시에 '변화'를 희구하는 미국민의 승리이기도 하다.

전체 인구의 2%에 해당하는 110만여 명의 외국인이 사는 한국은 이미 다문화사회로 접어들었지만 그 속성과 변화의 가능성은 미국과는 사뭇 다른 듯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돈도 없는데 방송을 계속하나"

제대로 된 스튜디오가 없어 복도에서 방송을 촬영할 때 한 팀원이 흐느끼며 미누(네팔) MWTV(이주 노동자의 방송, www.mwtv.or.kr) 상임대표에게 했다는 말이다. 지난 2004년 12월 문을 연 MWTV는 그렇게 어렵고 외로운 과정을 거쳐 한국의 대표적인 에스닉 미디어(Ethnic Media)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어떨까. 12일 서울 용산동 국제학교에 있는 방송국에 가보니 사정은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다. 비영리 민간단체인 '수유+너머'의 도움으로 최소 금액을 내고 스튜디오 용도의 방 하나와 사무실을 쓰고 있다. 하지만, 스튜디오는 방음시설이 갖춰지지 않아 소리가 울린다는 항의를 받기 일쑤다. 복도를 지나는 사람의 발소리가 녹음되기도 한다.

일부 후원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촬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운영비를 마련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작년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3개월여 동안은 후원이 끊겨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MWTV는 최소비용을 받는 상근직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직원이 자원봉사로 일하는 거주 외국인이거나, 다문화가정이 있는 자원봉사자다. 미누 대표는 "언제 방송이 없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방송을 계속하는 이유는 뭘까. 미누 대표는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우리만의 매체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2003년 외국인 노동자 강제추방에 반대하는 85일간의 농성에 참여했다. 많은 언론이 이를 취재했다. 그 때마다 취재에 적극 협력하고 한국사회의 일원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려던 이들의 소망은 번번이 좌절됐다.

취재를 하고 간 기자와 PD들은 전화를 걸어와 "열심히 리포트 하고 기사를 썼지만 다른 뉴스 때문에 밀렸다"며 "미안하다"고 말하기 일쑤였다. 미누 대표가 "방송이 전파를 탄 첫날 꿈같은 기분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다.

외국인을 보는 '편견'의 이미지가 미디어를 통해 반복 재생산 되는 것 역시 이들이 방송을 고집하는 이유다.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국내 거주 외국인을 불법체류자, 돈이 필요해 한국행을 택한 가난한 신부, 외국인 유학생 정도로 그리고 있다. KBS <미녀들의 수다>등을 비롯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오락적 시선에서 외국인을 바라본다.

뉴스를 비롯한 보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미누 대표는 "언론에서는 사건이 있을 때만 외국인을 비춰 거주 외국인을 범죄자로 인식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자기 목소리 내기'와 '편견의 이미지 깨기'를 목표로 이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MWTV는 지난 2004년 이주 노동자의 방송을 설립한 이후 2005년부터 시민방송 RTV에서 <이주 노동자 세상>이라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다국어 이주노동자 뉴스>라는 보도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하고 있다. <다국어 이주노동자 뉴스>는 월 2회 80분 분량으로, 10개국어로 다양한 국내뉴스를 거주 외국인에게 전하고 있다.

외국인 거주자들의 반응은 아주 좋다. 현지어로 뉴스를 본 노동자들이 전화를 걸어와 "고향에 있는 것 같이 푸근하고 좋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가끔 찾아와 "왜 우리나라 말로는 방송을 하지 않느냐"고 항의성 제안을 하는 외국인도 있다.

한국에 와 있지만 한국어가 서툴러 국내사정에 어두운 외국인들에게 국내뉴스를 전해 스스로 권익을 챙기고, 어떤 준비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 공감하는 거주 외국인이 많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결코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이주노동자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방송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도록 능동적으로 나선다는 게 이들의 목표다.

미누 대표는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을 두고 "항상 우리 곁에 이웃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투명인간처럼 제 자리를 잡고 있지 못하다"며 "이들을 미디어에 자주 등장시키고 얘기하게 함으로써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인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항상 지원받는 자, 수혜의 대상으로 인식됐던 외국인 노동자를 동등한 위치에서 걸어가는 사람들로 인식하게 하는 게 이들의 소망이다.

MWTV는 자신들의 뜻을 알릴 다양한 기회를 찾고 있다. 합법적으로 거주하지 않아 텔레비전에 출연하기 힘든 외국인 노동자의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 내년부터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시작할 계획이다.

2006년 부터는 매년 여름 이주 노동자들이 직접 만든 영화를 전국을 순회하며 상영하는 이주노동자 영화제를 열고 있다. 성서공동체라디오(성서FM), MNTV(www.mntv.net), 이주노동자방송국(www.migrantsinkorea.net) 등 다른 에스닉 미디어와의 연대도 모색하고 있다.

한국에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제 목소리를 찾고자 하는 외국인들은 힘겹지만 여럿이 함께 웃으며 걷고 있다. 열악한 에스닉 미디어의 현실은 다문화시대에 접어든 우리 사회의 준비와 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어렵지만 스스로 해나가는 일들을 통해 외국인 노동자가 후원과 시혜의 대상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미누 대표의 말이 울림을 준다.

■ MWTV 네팔어 뉴스 이끄는 발랄한 앵커, 기타 포우델
"거주 외국인 사회적 발언 계기되길"
이화여대 영문과 재학하며 자원봉사 활동… "미수다 나가고 싶어요"


“안녕하십니까. 77회 MWTV 다국어 이주노동자 뉴스입니다. 대법원은 9월 25일 버마민족 민주동맹 NLD한국지부 회원인 버마인 8명에게 난민의 지위를 인정했습니다.”

합장을 하고 침착하게 방송을 진행하는 모습이 다부지다. 캐주얼 차림이지만 또렷한 눈매와 말투로 제법 앵커다운 분위기를 낸다. MWTV(이주노동자의 방송) 다국어 뉴스의 네팔어 앵커를 맡고 있는 기타 포우델(23. 사진) 씨의 지난달 14일 방송분이다.

12일 오후 서울 용산동 MWTV에서 마주 한 기타 씨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거주 외국인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자주 웃고 당당하게 자기 의사 표현을 하는 모습이 20대의 평범한 우리 대학생들과 같다.

실제 생활도 마찬가지다. 그는 현재 이화여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며 시간을 쪼개 MWTV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한다.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수업을 거의 영어로 하다보니 한국말을 잘 하지는 못한다.

“미수다(KBS 미녀들의 수다)도 나가고 싶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우를 하고 싶기도 하다.”

이주노동자 방송에서 일하는 이유 역시 예상과 달리 전혀 정치적이지 않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유명해지고 싶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는 미디어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대학생이다.

MWTV에서의 일 역시 스스로의 성취감을 위해서다. 그는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혼자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싶다”며 “가족들이 방송을 보고 전화를 걸어 ‘우리 딸 좋은 딸이네’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며 다시 웃는다.

‘긍정’은 기타 씨의 습관 중의 하나인 것 같다. 한국에서 본인의 정체성을 고민한 적 없냐고 묻자 그는 “생김새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항상 편안하게 고향에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잊고 산다”며 “네팔과 한국의 정서가 비슷해서 특별한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기타 씨가 거주 외국인 현안마저 잊고 사는 것은 아니다. 기타 씨는 MWTV 활동을 두고 “미디어가 거주 외국인에게 사회적 발언의 기회를 주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한국이 빨리 경제위기를 벗어나서 많은 외국인들이 와서 함께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잊지 않았다.

기타 씨는 에스닉(ethnic) 방송으로 2%의 제 목소리를 찾으려 하는 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단면일 수 있다. 그들은 선입견만큼 ‘빨갛’지도 않고, 반대만 일삼는 ‘반대론자’이지도 않다. 우리 젊은이들처럼 밝다. 사실, 그보다 더 긍정적이며 장?G빛 미래를 꿈꾼다.

“신문이 나오면 꼭 보내주세요. 친구들에게 자랑하게요.”

철 없는(?) 기타 씨가 다시 웃는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