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돌아보고 현재 직시 미래 설계 남녀노소 자아성찰의 기회

# 지난 12일 광주YMCA에서는 <8인의 삶, 소중한 순간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4월 개강한 ‘내 인생의 자서전 학교’ 수강생들이 8개월 간 쓴 자서전을 엮어 책으로 펴낸 것이다. 8명의 저자들은 “지난 삶을 정리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 지난 2월14일 서울 서대문청소년수련관에서는 대안학교 ‘도시 속 작은 학교’의 졸업식이 열렸다. 5명의 졸업생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와 자신의 자서전을 낭독했다. 한 학생은 이 졸업이 “자신이 제대로 끝맺은 최초의 일”이라며 감격해 했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는 시대다.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으로 누구나 삶의 단편을 저장하고, 그때그때 겪고 느낀 바를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때에 자신의 지나온 삶을 하나의 서사로 구성하는 자서전 쓰기는 시대에 뒤떨어진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서전은 위인이나 쓰는 것이라는 인식도 여전하다. 하지만 자서전을 써본 사람들은 그것이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내 인생 책으로 쓰면 몇 권은 될 것이여.”

<8인의 삶, 소중한 순간들>의 공동 저자 중 한 명인 김경옥(61) 씨가 자서전을 쓰게 된 계기는 한 70대 노인의 말 한 마디였다. 그런 분들의 사연을 대필해보고 싶었다. 연습 삼아 자신의 삶을 먼저 써보기로 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출발점이었기 때문일까. 자서전을 쓰면서 ‘어떤 삶이든 고귀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잘 했던 일을 떠올리며 기뻐하기도 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잘못한 일을 되새기며 울기도 했어요. 그런 경험과 반성을 통해 성숙한 나는 평범하더라도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자서전 쓰기는 이처럼 삶을 긍정하게 만든다. 작가 이남희는 <자기 발견을 위한 자서전 쓰기>에서 자서전 쓰기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 의미를 캐내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나를 기록하라: 성공을 부르는 자서전 쓰기>의 저자 현혜수도 ‘당신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삶의 매뉴얼을 갖고 있는 사람’임을 깨닫는 것이 자서전 쓰기의 의의라고 설명한다.

삶의 의미는 종종 상처를 극복함으로써 얻어진다.

<8인의 삶, 소중한 순간들>에도 저자들의 상처가 담겨 있다. 아내와의 사별, 5ㆍ18 민주화운동 때 부상 당한 경험, 1998년 외환위기 때 가계가 어려워져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경험 등이다. 이런 상처가 자서전을 통해 정리된다. ‘내 인생의 자서전 학교’를 기획한 정의춘 간사는 이 책의 핵심이 “상처를 드러내고 극복해 삶의 가치를 만든 저자들의 용기”라고 말했다.

자서전의 의미는 개인적인 수준에만 머물지 않는다. 개인의 삶은 시대ㆍ사회와 긴밀하게 얽혀 전개되기 때문이다. 나이 든 세대의 자서전은 종종 한국 근현대사의 생생한 증언이다.

민족예술인총연합 진주지부는 지난해 말 ‘평범한 자서전 쓰기 교실’ 수강생 21명의 자서전을 펴내면서 ‘자서전으로 본 우리 근, 현대사’라는 부제를 붙였다. 개개인들이 일제 시대, 6ㆍ25전쟁, 박정희 정권 등의 역사적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왔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이런 점에 착안해 언론인 강상헌 씨가 준비하고 있는 ‘자서전학교(www.mystoryschool.com)’는 ‘민중의 아카이브’를 지향한다. 식민지 경험와 전쟁, 군부 독재 등에 의해 생긴 한국 근현대사의 틈을 자서전으로 메우려는 시도다. 나이 든 세대의 경험이 사회 전체의 자산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4- 대안학교‘도시 속 작은 학교’졸업식 자서전을 읽는 박민 졸업생
5- 대안학교‘도시 속 작은 학교’졸업식
6- ‘도시속 작은 학교’ 학생들이 직접 쓴 자서전
4- 대안학교'도시 속 작은 학교'졸업식 자서전을 읽는 박민 졸업생
5- 대안학교'도시 속 작은 학교'졸업식
6- '도시속 작은 학교' 학생들이 직접 쓴 자서전

자서전학교는 누구라도 스스로 자서전을 쓸 수 있도록 돕는 캠페인성 사업이다.

자서전 쓰기 교육과정을 개발해 기업과 학교, 사회복지기관 등에 제공하고 그 과정에서 좋은 자서전을 발굴해 출판까지 지원하는 내용이다. 내년에 본격적으로 가동된다. 지난 11월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강 씨는 “벌써 인터넷을 통해 문의가 많다. 그만큼 자서전에 대한 대중적 욕구가 있고 자서전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동의가 형성되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자서전을 쓰려는 욕구 자체가 역사적 상처의 방증인지 모른다. 1978년 한 중앙일간지에 입사한 후 언론인으로 살아온 강 씨 역시 기자로서 겪은 젊은 시절을 쓰고 싶어 한다. 그 ‘격동의 시대’에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묻힌 이야기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서전 학교는 강 씨 자신의 자서전을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의 일환이기도 하다.

김선태(65) 씨는 2006년 서울 용산노인종합복지관에서 ‘노인자서전쓰기’ 과정을 수강하며 쓴 자서전을 블로그에 연재하고 있다. 김씨에게 자서전을 쓴 경험은 이후의 삶을 더 열심히 사는 계기가 되었다. 지나온 삶을 정리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한 김씨는 현재 국립민속박물관과 서대문자연사 박물관 해설사, 동사무소 주민자치센터의 강사로 일하고 있다.

이처럼 자서전을 쓴 경험은 삶의 터닝포인트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안학교 ‘도시 속 작은 학교’는 학생들이 스무 살 전후의 삶을 잘 이을 수 있도록 자서전 쓰기를 장려한다. 자서전을 쓰는 것이 졸업 요건이다.

올해 2월에 졸업한 박민(20) 씨는 자서전 쓰기가 “미래를 설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어려서 왜 그렇게 방황했나 싶더라고요. 대학 들어가서는 제대로 살아보자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자서전을 마쳤을 때 느낀 성취감이 미래에 대한 자신감으로 남았다. 그는 자서전 제목을 ‘카모밀레 이야기’로 정했다. 카모밀레는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이다. 박씨는 현재 대학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다.

2000년부터 ‘도시 속 작은 학교’에 근무한 정상희 교사는 매년 학생들이 자서전을 쓰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다. 정 교사는 자서전 쓰기가 하나의 통과의례라고 설명했다. “어린 학생들은 자신이 했던 일이 어떤 의미이고, 어떤 결과를 낳을지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자서전을 하면서 그것을 정리하게 되는 겁니다.”

정 교사는 자서전에 엄마 이야기를 쓰고 펑펑 운 한 학생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것을 쓰면서 자신이 왜 그렇게 엄마에게 감정적으로 굴었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자서전 역시 글의 일종이고, 글은 기본적으로 소통을 목적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인 ‘하자센터’의 양선미 교사는 자서전 쓰기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는 시도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자서전 쓰기와 관련한 책들에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찾아볼 수 있다. <노인 자서전 쓰기>는 “자서전 쓰기를 통해 그동안 상처를 주고 받았던 인간관계를 생각하며 응어리졌던 감정들을 해소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나를 기록하라>는 나아가 “자서전을 쓰려면 먼저 타인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부터 가다듬자”고 제안한다. 한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만큼, 제 삶의 “출연자”들과 화해하는 것이 곧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난 5일 정신경영아카데미 홈페이지(www.mentalacademy.org) 게시판에는 한 ‘르포전문기자’의 글이 올라왔다. 유소년기의 경험에서 출발해 대학·대학원 시절을 거쳐 기자가 된 사연을 담은 전형적인 자서전이었다. 그런데 제목은 ‘미래 자서전’이다. 정신경영아카데미의 ‘셀프 리더십 프로그램’을 수강한 한 기자 지망생이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와 과거를 회고한 글이었다.

셀프 리더십 프로그램의 ‘미래 자서전 쓰기’는 리더십 훈련에 정신의학의 상담치료 방법을 응용한 것이다.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 이 고통을 통해 더 강해지고 행복해진 미래를 상상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환자는 미래의 심정으로 현재를 봄으로써 고통에 담담해지고 힘을 얻는다. 리더십 훈련에서는 수강생이 이루기를 원하는 미래의 상황에서 현재를 보면서 특정한 기술, 자산, 네트워크 등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이해하고 그것을 성취하려는 의지를 북돋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미래 자서전 쓰기도 자서전 쓰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의 저자 강헌구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신념을 갖게 된 사건들을 기억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라”고 조언한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쓴다. 하지만 기술적 가능성이 ‘왜, 어떻게 써야할지’에 대한 대답까지 주는 것은 아니다. 올해만 해도 <치유하는 글쓰기><전방위 글쓰기><창조적 글쓰기> 등 대중을 겨냥한 글쓰기 책이 쏟아져 나왔다. 글쓰기의 의미와 방법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는 증거다.

글쓰기가 자아를 발견하고 확인함으로써 타인과 소통하려는 시도라고 본다면, 이는 자신을 찾으려는 욕구가 커졌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시기에 자서전 쓰기는 더욱 중요할 수 있다. 자서전 쓰기는 모든 글쓰기의 기본이며 삶의 단편들을 잇고 이해함으로써 ‘나’의 정체감과 가치를 깨닫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 자서전, 이렇게 쓰세요

나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먼저다_김선태

자서전은 흔히 유명한 사람들만 쓰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라도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 다음 세대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작업이다.

유서를 쓰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라_이남희

자서전 쓰기는 삶을 되돌아보며 의미를 캐내는 일이다. 죽음을 생각했을 때 삶이 더 잘 보인다.

좋은 자서전을 많이 읽어라_강상헌

최근 출간된 이희호의 ‘동행’과 스콧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오토다케 히로타다 ‘오체불만족’ 등 자서전의 고전을 추천한다.

제목을 잡아본다_정상희

자신의 인생을 설명할 수 있는 제목을 최대한 많이 생각해본다. 그 제목에서부터 출발한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때 사고를 쳤다”라고 적은 후, 그게 어떤 사고였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정리해본다.

특정 단어에서 과거를 연상하는 훈련을 한다_김경옥

예를 들면 사투리, 그 중에서도 ‘워메’ 같은 한 단어에서 과거를 연상해 글을 쓰는 연습을 한다.

미래 자서전을 쓸 때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라_문요한(정신경영아카데미 대표)

예를 들어 5년 후 책을 내고 싶다면, 출판기념회를 여는 상상을 하는 식이다. 그 상황을 현재형 문장으로 표현해 보는 것도 좋다.



박우진 객원기자 mondenkind@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