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의 주제로 37편의 영화를 미학적 관점에서 조명 진중권 지음/ 씨네21북스 펴냄/ 13,000원

고종석, 강준만, 홍세화, 지승호. 이들은 ‘글 잘 쓰는 칼럼니스트’ 수준을 넘어 이미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수천 명의 팬들이 겉표지에 적힌 그들의 이름만 보고 덥석 책을 구매한다. 미학자 진중권 역시 하나의 브랜드다.

비록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을 알린 책이 (전공인 미학관련 서적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을 무참하게 ‘깠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였을 지라도, 10대들은 그를 심형래 감독의 괴수 영화를 둘러싼 ‘디워 논쟁’에서 무참하게 ‘까였던’ 말 많은 아저씨로 기억할 지라도, 그가 썼던 책과 그 반응(판매량)은 그가 한국의 지식인임을, 또한 꽤 괜찮은 브랜드를 가진 글쟁이임을 보장하고 있다.

그가 쓰는 책은 크게 두 가지 축을 기준으로 나뉜다. <미학 오디세이>시리즈, <현대 미학강의>로 대표되는 전공 관련 교양서적과 <빨간 바이러스>, <호모 코레아니쿠스>와 같은 사회 비판서다.

전혀 다른 두 가지 영역의 저서들은 그가 ‘현실 참여적 지식인’임을 드러낸다. 이 수식어는 그를 스타로 만든 기제이자 디워 논쟁처럼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 사유가 되기도 한다.

신간 <진중권의 이매진>은 이런 저자의 특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책이다. 제목에는 브랜드인 저자의 이름이 들어갔다. 이 현실 참여적 지식인은 영화란 대중문화를 분석하며 자신의 전공인 미학을 도입한다. 디워 논쟁의 후유증인지, 그는 책의 첫 머리에 ‘이것은 영화비평이 아니다, 담론의 놀이다’라고 선을 긋고 시작한다.

■ 기술은 예술을 변화시킨다

이 책은 디지털 기술이 영화의 내용과 형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데서 시작된다. 기술은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바꾸고 기술발전에 관한 과학 담론과 인문학 담론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변용된다. ‘영화의 죽음’, ‘복제에서 생성으로’, ‘서사의 파괴’, ‘기술과 신체’ 등 10개의 주제로 묶인 이 책은 37편의 영화를 미학적 관점에서 조명한다.

저자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바꾸고 있다’고 단언한다. 이를테면 스크린에 비치는 이미지, 내러티브의 구성, 영화의 소재, 제작 방식과 관객 반응 등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변화는 영화의 이미지. 종래 전통적 영화에서 카메라는 피사체를 담지만, 디지털기술은 카메라마저 가상화시킨다. <슈렉>와 <폴라 익스프레스>, <베오울프>등 컴퓨터그래픽(CG) 기술에 의존한 영화에서 디지털 대역 배우의 연기는 진공에서 이루어진다.

배우들은 카메라가 아니라 컴퓨터 앞에서 연기를 하는 셈이다. 실사와 CG의 구별이 흐려지면서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는 무너진다. 영화가 현실 상황을 렌즈에 담아내는 ‘재현’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생성’의 개념으로 접어드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제 영화는 새로운 미학적 선택 앞에 서게 된다. 미디어학자 레프 마노비치의 말대로 “(영화는) 우리 현실을 열등하게 재현하는 게 아니라 다른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라고 말이다.

디지털 기술은 영화 내러티브(일련의 사건이 가진 서사성)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관객의 선택에 따라 극의 진행과 결말이 바뀌는 영화가 출현한 것. 2005년 출시된 비디오 게임 <파렌하이트>는 관객이 극중 인물을 서로 돕거나 대립시키며 커다란 줄거리를 만들어 나가는 작품이다.

‘인터랙티브 필름(interactive film: 관객이 극의 전개에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영화)’으로 불렀던 이 작품은 게임과 영화의 구별을 넘어서고 있다. 한편, 전통적 영화 내에서도 여섯 개의 플롯을 병렬 진행시키는 <나비효과>나 시간을 두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메멘토>처럼 선형적인 서사를 파괴하려는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1- 폴라익스프레스 The Polar Express/로버트 저메키스 | 2004/100분
2- 슈렉 Sherk / 앤드류 아담스, 바키 젠슨 | 2001 / 90분
3- 라이언 일병 구하기 Saving Private Ryan 스티븐 스필버그 | 1998 / 170분
4- 블루 벨벳 Blue Velvet 데이빗 린치 | 1986 / 120분
5-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The Passion of The Christ / 멜 깁슨 | 2004 / 125분

■ 영화와 영화 담론의 변화

저자는 발터 베냐민의 말을 빌어 다시 2000년대 영화를 분석한다.

베냐민은 영화가 현대인의 지각을 ‘시각적인 것에서 촉각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고 말한 바 있는데, 디지털 시대에 영화가 보여주는 ‘촉각성’(등장인물의 신체에 가해지는 고통을 보며 관객이 느끼는 충격)은 영화 몰입의 수단이 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관객은 오하마 해변에서 기관총에 난사당하는 촉각적 충격 속에서 전쟁의 순간을 트라우마로 체험한다. 예수 수난의 24시를 그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는 채찍질로 살이 찢어지거나 십자가에 손이 못 박히는 장면 등 고문 장면을 극단으로 밀고 나감으로써 예수의 고통을 그대로 관객의 신체에 이식한다.

영화의 변화는 영화 해석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최종 의미를 알 수 없는 영화가 선보이기 시작한다. <라쇼몽>의 경우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한다.

<블루 벨벳>은 매우 다의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다. 저자는 “모든 관객은 같은 영화를 보면서 각자 다른 해석을 내린다”고 결론 내린다.

미학적 관점에서 영화를 분석한 이 책은 영화보다 미학에 방점이 찍혀 있다. 데카르트에서 베냐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양 철학 사상을 영화 분석에 도입한다.

새로운 기술은 예술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예술은 인문학적 담론 주제를 바꾼다. 이제 새로운 시대는 예술가, 공학자, 인문학자가 만나서 함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는 시대가 될 것이다. 기술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 인간 스스로에 대한 개념마저 새롭게 만들고 있다. 저자는 철학자의 눈으로 그 관계들을 촘촘히 살피고 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