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에서의 충고-기형도의 삶과 문학박해현, 성석제, 이광호 엮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1만5000원이시대 문인들의 '기형도 신화' 다시읽기 20주기 추모 문집에 담아

현대 한국문학사에서 기형도만큼 홀연하고 수상한 기담이 또 있었나.

단 한 권의, 그것도 사후에 동료 문인들이 내준 시집('입 속의 검은 잎')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은 공공연한 풍문처럼 강하고 질겼다.

시대의 우울을 감히 아름답게 정제한 기형도의 시어들은 종종 심야 극장에서 영문도 모르게 숨을 거둔 그의 최후, 그 궁지 같은 사건에서 풍기는 어떤 정서들과 구분할 수 없게 얽힌 채 읊조려지곤 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그러니까, 시인의 죽음과 함께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정과리의 지적이다. "기형도에게 죽음은 의미의 종말이 아니라 의미의 시원이었다."('죽음, 혹은 순수 텍스트로서의 시'-'기형도 전집'에 부쳐)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아니, 지나고 있다. 기형도는 어느새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평론마저도 판단을 주저할 정도다. "그 신화들을 걷어내고 기형도라는 텍스트'자체'만을 읽는 것이 가능할까? 기형도의 시에 대해 어떤 내재 분석도 사실은 그 신화의 바깥에서 이루어지기 힘들다.

그러면 그의 죽음 이후 20년,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이광호, '기형도의 시간, 거리의 시간') 기형도 20주기를 맞아 기획된 추모 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기형도의 삶과 문학'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차라리 기형도라는 신화를 역사적 혹은 문화사적인 사건으로 인정"한 "위에서 그 신화를 재문맥화하는 작업"을 시도하려 한다. 그것은 "기형도의 시간과 한국문학과 현대시의 시간을 겹쳐서 읽는 일"이다.(이광호, 위의 글)

그런 맥락에서 책은 세 단계를 거친다. 스스로 '포스트-기형도' 세대라고 일컫는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의 좌담과 기형도의 문학적 연대기, 문학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글들을 지나 생전에 기형도를 만난 문인들의 회고를 듣는다. 마지막으로 지난 20년간 발표된 기형도에 대한 비평들 중 주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글들을 모아 실었다.

2000년대 젊은 문인들은 자신들이 겪은 진부하지만 강박적인 '통과의례'로서의 '기형도 신화'를 고백한다. 그리고 시대적 정황을 살펴 기형도가 신화적 공기를 덧입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자연스러움'을 도출한다.

"낮에는 박노해와 백무산의 노동시를 읽고 열띠게 토론하던 문학청년들이 밤에 홀로 들으며 조용한 위로를 받았"던 "포스트-80년대 청춘의 비가"(함돈균, '수상한 시대에 배달된 청춘의 비가-기형도의 문학적 연대기')이자 90년대 세대에게는 "80년대가 지나온 세대가 무겁고 커다란 사회적 타자에 맞부딪히며 괴로워한 흔적들을 넘겨주는 역할"(하재연)을 한 일종의 증언으로서 기형도의 시를 읽어낸다.

젊은 문인들이 기형도로부터 그의 시를 분리한다면 두 번째 단계의 문인들은 되려 기형도와 그의 시를 접착함으로써 신화를 해체하려 한다. 기형도의 몸에서 시가 불려나온 구체적인 순간을 기억하는 방식을 통해서다. 이들에게 기형도의 시란 추상적 엘레지도 근거 없는 풍문도 아니다.

그것은 기형도라는 '검은 눈썹과 노래 잘하던 아름다운 목청'을 가진 한 실존으로서의 기형도와 단단히 결부되는 물질이다. 그러므로 회고들의 결말은 끝끝내 그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형도야, 네가 나보다 먼저 가서 내 선배가 되었구나. 기왕지사 그렇게 되었으니 뒤돌아 보지말고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썩어서 공이 되거라."(김훈, 기형도 시의 한 읽기)

이제 비로소, 이제껏 기형도 신화를 촉발시키거나, 뒷받침하거나, 하다못해 반발함으로써 오히려 그 명실상부한 중요를 입증해온 비평의 궤적이 되풀이된다.

우리도 비로소 기형도가 시대와 사회, 그리고 개개인의 맥락을 어떻게 비추었고 그것 속에서 어떻게 구부러졌는지를 유념하며 이 비평들을 거스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답에 이른다. 기형도가 이토록 강하고 질기게 존재해 온 것은 그의 시가 '죽음'의 시가 아닌 '추모'의 시였기 때문이라는 사실 말이다.

"우리의 그는 저 '강철'의 시대였던 1980년대를 이십대로 통과해온 우리에게 추모시를 쓰게 했다. '사랑'을 잃은 우리에게 '사랑'을 쓰게 했다.

우리가 선명하게 인식했든, 아니면 무의식의 차원이어서 희미했듯, 1989년 3월7일 이후 우리는 추모시를 썼다. 진정한 삶을 살고자 애쓰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삶에는 죽은 사람의 삶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우리의 삶은 죽은 삶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이문재, '기형도에서 중얼거리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