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 Culture] 전주이씨 문중 개성에 있는 이성계의 정비 신의왕후 제릉 자료 공개

오는 6월 세계 문화유산계의 눈은 스페인을 향한다. 이곳 세비아에서 열리는 제3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될 문화유산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조선 왕릉과 남해안 지역 백악기 공룡 해안에 대한 등재를 신청해 놓은 상태다. 문화재청을 비롯한 국내외 관계자들은 일단 조선 왕릉의 등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은 태조(太祖) 이성계(1335~1408)의 정비(正妃) 신의왕후(神懿王后, 1337~1391)의 능(陵)인 제릉(齊陵)이 구체적으로 공개돼 주목을 받고 있다. 문화재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데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남북 문화(학술)교류의 가교 등 다양한 함의를 지닌 이유에서다.

조선왕조는 1392년 개창된 이래 1900년까지 27명의 국왕이 등극하였으며, 이들과 왕비가 승하할 경우 임시관청인 도감(都監)을 설치해 무덤을 조성하였다. 조선 왕릉은 현재 42기(基)가 전해지고 있다. 이중 남한에 40기가 있고, 신의왕후의 제릉과 제2대 왕인 정종(正宗)과 정안왕후의 능인 후릉(厚陵) 2기는 북한의 개성 지역에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말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있는 외규장각 의궤 중의 하나인 '후릉수개도감의궤(厚陵修改都監儀軌)'를 한글로 번역 출간해('가보고 싶은 왕릉과 그 기록-풀어쓴 후릉수개도감의궤') 후릉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그러나 신의왕후의 제릉은 그 가치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실체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조선 왕릉 42기 중 유일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는 셈이다. 그런데 최근 태조의 후손인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에서 제릉 사진과 함께 다양한 자료를 입수해 조선 왕릉의 공백을 상당 부분 메우고 있다.

전주이씨익안대군파종회(全州李氏益安大君派宗會) 이전구(李田九) 종회장은 "제릉은 조선 왕릉의 하나이지만 조선을 창건한 태조의 정비 능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전주이씨 여러 분파의 뿌리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신의왕후가 제릉의 의미와 더불어 조선 개국과 관련해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평가한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하는 과정에 내조의 힘을 발휘했고 무엇보다 그의 후손들이 개국 초기 혼란을 수습하고 조선을 안정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신의왕후는 고려 말 안변 지역 세력가인 증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한경(韓卿)의 딸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와의 사이에 방우(芳雨), 방과(芳果, 정종), 방의(芳毅), 방간(芳幹), 방원(芳遠, 태종), 방연(芳衍) 등 6남과 경신(慶愼), 경선(慶善) 등 두 공주를 두었으며 조선 개국을 1년 앞두고 병으로 1391년(공양왕 3년) 55세에 승하했다.

처음 시호(諡號)는 태조가 즉위한 후 절비(節妃)라 하였고, 정종(定宗) 대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追尊)되었다. 태종(太宗)은 1408년(태종 8년) 승인순성신의왕태후(承仁順聖神懿王太后)로 시호를 높였고, 1899년(광무 3년) 고종에 의해 황후(皇后)로 격상(格上)되어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 추존되었다.

규장각(奎章閣) 자료에 의하면 신의왕후는 승하한 뒤 해풍군 치속촌에 장사지냈다가 조건 개국 후 능호를 제릉(齊陵)이라 하였다. 이후 1407년(태종 7년)부터 공조판서 박자청에 의해 왕릉이 확대됐다.

제릉은 태조 능인 건원릉(健元陵)과 태조의 계후(繼后)인 신덕황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 그리고 앞서의 후릉과 함께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왕릉이다. 조선 왕릉의 전형적 요소를 고려하면 제릉이 시기적으로 가장 앞섰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제릉이 갖는 문화재적, 학술적 가치는 크다.

제릉은 박자청의 감독하에 공시가 진행됐다. 그는 정릉 조성시 실무를 담당했으며 1408년 태조 건원릉을 담당하기도 했다.

당시 제릉과 건원릉은 고려 말 공민왕의 현정릉(玄正陵)을 모범으로 했다. 제릉 역시 봉분을 12면 면석으로 병풍처럼 두르고 모서리마다 인석(引石)을 놓고 그 주위에는 석난간을 둘렀다. 난간석 밖에는 동, 서, 북 3면에 낮은 높이의 곡장(曲墻)을 쌓고 그 안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세웠는데 현재 제릉에는 곡장의 흔적만 있고 그 안의 석양과 석호도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봉분 앞 상석(床石)과 혼유석(魂遊石)은 온전하고 그 양쪽의 능을 지키는 망주석(望柱石)은 뚜렷하게 마주하고 있다. 그 아래로 불을 밝히는 장명등(長明燈, 석등)이 서있고, 좌우 양쪽에 문인석(文人石)과 석마(石馬) 한 필씩이 있다. 다시 한단을 낮춘 곳에는 무인석(武人石) 한 쌍과 석마 한 필씩을 세웠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병풍석의 문양이나 문인석과 무인석 등의 양식에서 고려 현정릉의 영향을 느낄 수 있지만 석호ㆍ석양의 배치, 능단의 형태, 장명등 등은 조선 왕조의 새로운 양식이라고 평한다.

이전구 종회장은 "제릉은 고려말에서 조선 왕조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하는 능으로 이후 조선 왕릉의 모델이 됐다"며 "장명등 6각의 등갓에 있는 동물 두상은 건원릉의 그것과도 다르다"고 말했다. 조선의 국시인 유교가 영향을 미친게 아니겠느냐는 게 이전구 종회장의 해석이다.

문화재 관계자들과 학계는 조선 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 그동안 소홀히 다뤄온 제릉을 포함해 조선 왕릉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북한과의 문화ㆍ학술 교류를 통해 조선 왕릉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것이 시대적 과제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조선 왕릉은 국가 문화유산이자 후손에겐 보물"

이전구 전주이씨익안대군파종회 종회장

신의왕후에 대한 역사적 조명은 물론 조선 왕릉의 모범인 제릉(齊陵)에 대한 관심도 부재한 가운데 최근 전주이씨익안대군파종회(全州李氏益安大君派宗會)의 신의왕후와 제릉에 대한 진지한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북한에 있는 제릉의 사진을 어렵게 입수해 학술적 조명에 나서는가 하면 종회의 소중한 사료로 활용해 종회의 단합과 숭조(崇祖)의 덕목을 확산하는 계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전구 종회장은 "제릉 같은 문화유산은 국가적 자산이면서 우리 문중의 귀보(貴寶)이기도 하다"면서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 널리 선양하면서 종회에서는 처음으로 파보(派譜)에 게재해 후손들에게 대대손손 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는 태조대왕의 3남으로 정종의 동생이며 태종의 형이다. 조선 개국 공신인 그는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때 사태 수습에 앞장섰으며 전주이씨 제군파의 맏이 역할을 하였다.

전주이씨 익안대군파의 지파로는 신성군파, 반남도정공파, 대림도정공파, 백파도정공파, 영가정공파 등이 있으며 전국에 걸쳐 6만여 명에 이른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