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작가] 지식인의 서고/'열하일기'와 '임꺽정'

바야흐로 100만 청년백수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게다가 이 사태가 단기간에 해결될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장기지속’의 상황인 셈이다. 이런 시대에 꼭 읽어야 할 고전이 있다. 하나는 ‘열하일기’, 다른 하나는 ‘임꺽정’. 둘다 ‘백수의 향연’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백수가 뭔 향연? 인가 싶겠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백수는 ‘빈손’이라는 뜻이지만, 그 빈손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담겨 있다. 믿기지 않는다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어보시라. 내가 ‘열하일기’를 만난 건 97년 IMF 직후다. 나는 그때 박사 실업자였다.

취업의 문이 하도 두터워 교수가 되는 길을 포기해버렸다. 대신 지식인공동체를 만들었다. 백수의 아픔을 공동체로 승화( )시켰다고나 할까. 그 즈음에 ‘열하일기’를 만났다. 경이로웠다. 연암 박지원은 아예 과거에 입문조차 하지 않았다. 일찌감치 과거를 때려치우고 지식과 우정의 향연을 펼치면서 한 세상을 풍미하였다. 그 자유의 산물이 바로 ‘열하일기’다.

열하로 가는 먼 길, 그는 그때도 일행 중 유일하게 프리랜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원의 천지와 마음껏 교감할 수 있었으리라. 어떤 통념이나 권위에도 갇히지 않고 마주치는 사건마다 특유의 리듬과 강렬도를 부여하는 것, 그건 오직 프리랜서만이 발휘할 수 있는 저력이다.

(좌) 열하일기 우리말 필사본 (우) 연암 박지원

그로부터 5년쯤 뒤, 바로 금융공황이 몰아친 작년 하반기 ‘임꺽정’을 만났다. 정말 우연이었다. 그런데 그 우연이 내 인생의 큰 변곡점을 만들어냈다. 리얼리즘과 저항문학의 대표작이라 여겼던 ‘임꺽정’이 아주 낯설고 새로운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과 우정에 대하여, 여성들의 위풍당당한 생존법에 대하여. 특히 비정규직과 백수에 대하여. 놀랍게도 청석골 칠두령은 ‘노는 남자들’이었다. 천민출신일 뿐 아니라, 그들에겐 직업이 없다. 땅이 없으니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밑천이 없으니 장사를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운명적으로 ‘길 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랑을 하고 우정을 나누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운다. 하여 그들은 모두 달인들이다. 활의 달인, 표창의 달인, 축지법의 달인, 돌팔매의 달인 등등. 이들의 여정에서 나는 다시금 백수의 자유와 열정을 맛볼 수 있었다.

‘열하일기’가 인테리 백수가 펼치는 지식의 향연이라면, ‘임꺽정’은 몸으로 승부하는 달인들의 향연이다. 10대엔 대학에 목숨걸고, 대학가선 취업에 올인하는, 하지만 결국은 ‘빈손’으로 세상에 나와야 하는 우리 시대 청년들에게 이 두 책을 꼭 권하고 싶다.

그러면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빈손으로도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음을, 또 길 위에서도 얼마든지 사랑하고 배우고 싸울 수 있음을.



고미숙/ 고전평론가,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