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작년에 읽은 책 중 배홍진의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라는 빼어난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한 유령작가가 즉 고스트라이터로서 오랫동안 대필작가를 해온 한 작가가 한 위안부 할머니의 유령같은 삶의 흔적을 다큐형식으로 ?아간 팩션이다.

작가는 말한다. 지난 몇 년간 나는 글을 쓰고 있었지만 존재하지 않는 작가였다고. 대필작가를 뜻하는 의미는 결국 타인을 대신하여 글을 썼고 타인의 이름이 적힌 몇 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길을 헤맸다고.

작가의 정체성과 작가가 써내고자 하는 글의 구성이 이렇게 궁합이 잘 맞는 책도 보기 드물다는 생각으로 나는 책장을 넘기곤 했다.

분명히 몸으로는 존재하지만 이름으로는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작가가, 분명히 몸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지만 이름은 이 세상에 여전히 남아있는 한 위안부 할머니의 흔적을 더듬어 가는 이야기는 그 역설이 자못 시대에 던지는 의미심장한 비유처럼 여겨져서 비장하기까지 하다.

유령이 되어가는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유령은 누구보다 자신을 외로워하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인간의 세계에서 유령은 자신의 몸에 흘러 있는 인간의 흔적으로 외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흔적으로 점점 외로워지는 유령들이란 결국 자신의 상상력에서 오는 슬픔과 연민이라는 사실을 감당하고 나서의 일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존재 전부를 걸고 유령의 의미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 든다. 유령작가, 유령처럼 살다간 위안부, 유령이 되어가는 연민, 그것들을 향해 그는 말미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기에 있는데 너는 어디로 갔는가’ 라고.

그는 220페이지에 걸쳐 자신은 문장의 고독에 주거했던 공동연립주택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흔적이란 희미할수록 내가 아닌 것들을 이해해 가는데 필수적인 참혹이다.

작가는 다시 말한다. ‘나는 그동안 세상에서 성공한 타인들의 이야기를 쓰며 먹고 살았는데 어쩌면 내가 쓴 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던 사람들의 이야기 인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그녀의 목소리가 자신의 손가락의 힘을 빌려 적어나간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이라고 간절하게 믿고 싶다고 했다.

나는 뜬금없이 그 부분에서 울컥 감동을 받곤 했는데, 소설을 쓰고 있었지만 늘 대필을 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어쩌면 자신의 외로움을 표현해줄 위안부 할머니의 손가락이 절실히 필요했는지도 모른다고.

아니면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이 언젠가는 수 천개의 이름을 가지고 연민에 대해 이야기 하는 순간이 오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 이쯤에서 그가 쓴 연민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일이다. ‘연민이란 타인에게 있을 지도 모르는 슬픔에 대한 우리들의 슬픈 상상력이다’

이 책이 가지는 정체성과 잘 짜인 구성 말고도 매혹 중 유난히 눈에 들어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문체에 있다. 작가는 숙성된 자신의 언어로 직물을 짜기 시작한다. 마치 거미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먹이에게 다가가듯이 자신이 언어를 향해 얼마나 허기져 있는지를 들키지 않는다.

문장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떤 지점에선 알 수 없는 몽매에 이끌려 밤에 야산으로 끌려가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어떤 문장 뒤엔 악몽 뒤의 침묵 같은 것을 감정 속에서 뜬금없이 발견하는 것 같다. 그는 아마도 오랫동안 비루한 세상에 문장을 매매하며 문장의 물목을 가두고, 비우고, 후려치고, 데우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나 역시 대필작가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한기’를 생각할 때, 내가 지금 그를 가득 연민하는 것은 자신에게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왜곡에 대해 어떤 노독 같은 것을 함께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혐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독자들이여 이 아름다운 문장들을 꼭 자셔보라!



김경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