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작가] '연화'의 저자-안니바오베이중국 인기작가 티베트로 간 세 남녀 통해 인간 내면의 험난한 여정 그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요한계시록 21장 1절’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성경 구절로 경건하게 시작한 이야기는 한 여류작가가 여행 도중 또래의 중년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 사람의 옛 사랑 이야기를 듣게 된다는 설정으로 치닫는다. 감성적 문체와 섬세한 감정묘사는 이 이야기가 일본의 그것이라 짐작하게 하지만, 사실 중국 작가 안니바오베이의 ‘연화’의 내용이다.

‘안녕 웨이안’(2001), ‘피안의 꽃’(2001), ‘사소한 일들’(2004) 등 소설로 이름을 알린 안니바오베이(35)가 한국을 찾았다. 장편 ‘연화’를 들고서. 2006년 발표한 이 소설은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에 소개된 첫 작품이다.

이 젊은 작가를 보라

“작가가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분이세요. 조용하게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저희도 출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전, 출판 관계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1998년부터 활동한 안니바오베이는 언론 인터뷰는 물론, 독자 사인회나 강연 등 외부활동을 철저하게 외면한 채 작품만 써왔다고. 중국내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이지만, 국내 거의 소개된 바 없는 까닭도 ‘은둔형 작업 스타일’ 때문인 듯했다.

“중국 출판계 공식적인 행사는 나가지만, 독자가 많으니까 얼굴이 알려지면 고국에서 생활하기가 불편해요. 물론 활동하는 중국 작가들을 알고 지내지만, 글을 쓸 때는 혼자 조용히 작업하는 편입니다.”

그녀는 산문집, 사진 에세이집, 소설집 등 8권의 책을 발표한 젊은 작가다. 그리고 발표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젊은 독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작가다. 첫 작품 ‘안녕 웨이안’은 100만 부, 대표작 ‘연화’는 70만 부를 판매했다. (중국 내 해적판 도서 판매량은 정품의 2~3배에 이른다.)

거대한 서사가 이어진 중국 소설을 두고 흔히 ‘대륙의 기상’이란 표현을 쓴다. 중국 특유의 현대사가 빚어낸 사회, 문화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까닭이다. 그러나 안니바오베이의 작품은 이런 특징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다. “현대 중국 소설과 스타일이 다르다”는 질문에 그녀는 “서양 문학과 중국 고전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플뢰베르, 뒤라스의 작품과 공자, 노자의 명언, 명청시대의 산문을 주로 본다”고 대답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산업화된 대도시에서 생활하지만 그 안으로 온전히 진입하지 못하는 소외된 자가 주를 이룬다. 이 아웃사이더들을 통해 작가는 현대인의 좌절과 불안, 고독과 소외감을 말한다. 인생의 허무함, 사랑에 대한 집착, 자아에 대한 성찰이 담긴 작품은 해외에서도 공감대를 형성한다. 안니바오베이의 소설은 일본, 독일, 대만, 홍콩 등에서 번역 소개된 바 있다.

“한국 작품 중에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 작가는 사회 변동기, 발전기에서 고뇌하는 사람을 그렸다는 점에서 이 감독과 닮은꼴인 듯하다.

“‘밀양’, ‘오아시스’, ‘박하사탕’을 모두 봤는데, 완성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관객이 깊이 생각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한국의 변동기, 발전기에서 고뇌하는 사람을 그렸지요.”

시원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다시 첫 부분, 소설 ‘연화’로 돌아가자. 2006년 발표한 이 작품은 작가가 티베트 모퉈를 여행한 후 이 풍경을 모티프 삼아 쓴 이야기다. 작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작품이자 문학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책이고, 작품성과 대중성에서 가장 인정받은 작품이라 (한국에) 이 작품을 먼저 소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병든 몸으로 티베트의 한 여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여류 작가 칭자오, 어린 시절 사랑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 티베트로 온 중년 남자 샨셩, 샨셩이 가슴속에 묻어둔 여인 네이허, 이 세 사람이 걸어가는 길에 관한 이야기다.

건강이 나빠져 모퉈로 간 칭자오는 우연히 샨셩을 만나고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샨셩과 자유분방한 네이허는 서로의 상처와 고통을 알아본 유일한 친구다.

각자 삶을 살던 그들은 간혹 만나며 어린 시절의 기쁨을 나누곤 했다. 그러던 중 네이허는 모퉈로 가서 교사를 하겠다고 떠나고, 샨셩은 이혼의 상처를 안고 고향에 정착하던 중 네이허를 만나러 갈 결심을 한다. 소설은 이렇게 연꽃이 숨어 있는 성지, 모퉈를 향해 떠난 세 사람의 여행이 중심을 이룬다.

얼핏 줄거리만 듣다 보면 연애소설 같지만, 작가는 “내가 전하고 싶었던 건 사랑이 아니라 정신상의 정화”라고 말했다.

“이 작품을 통해 두 가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억압받는 현실과 이를 내면적으로 초월하려는 인간 내면의 모습이요. 인간은 모두 현실에 땅을 붙이고 살면서도 환상을 꿈꾸지요. 독자들이 이 두 측면 모두 느꼈으면 합니다.”

또 다른 키워드는 작품의 배경인 티베트 ‘모퉈’다. 티베트 어로 ‘꽃송이’란 뜻을 담고 있다. 티베트 사람들은 ‘연꽃의 숨은 보석이여’란 말을 자주 읊조리는데, 이는 윤회를 바라는 티베트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는 말이라고. 동시에 수행 속에 깨달음을 찾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가는 책머리에 써 두었다. ‘실제 장소를 배경으로 썼지만, 소설인 이상 그 장소는 새로운 암시를 창조한다’. 인터뷰에서 그는 “제목인 ‘연화’는 소설 배경이 되는 장소다. 모든 것이 정화되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따라서 함께 걸어간 티베트 모퉈의 여정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인간 내면에 자리한 기억과 상상, 지향과 추구,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인 셈이다.

여기, 세밀한 묘사와 감성적 문체로 무장한 촘촘한 이야기가 있다. 거대한 서사의 틀에서 벗어나 내면에 천착하는 작가의 시선은 중국 문학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억압된 현실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의 비애. 읊조리듯 내뱉는 느릿느릿한 말투.

이 젊은 중국 작가가 펼치는 이야기를 주목해보자.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