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소멸'] 가족서 고향·고국으로 이어지며 대상을 넓혀

요새는 무슨 일에 있어서나 분량과 정도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이 문제와 연관된 논리적 수수께끼가 하나 있는데, 흔히 부자와 가난뱅이의 오류라고 알려진 것이 그것이다.

한 가난뱅이가 있다. 누군가가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 계속해서 1원 동전을 주기 시작한다. 무일푼이던 가난뱅이는 곧 십 원을 갖게 되고, 그 다음에는 백 원을, 그 다음에는 천 원을, 그 다음에는 만 원을 갖게 된다. 누군가의 호의는 끝나지 않고 되풀이되어, 가난뱅이의 눈앞에는 무수히 많은 1원짜리 동전들이 쌓인다.

이때 가난뱅이가 더 이상 가난하지 않고 부자가 되는 시점은 언제일까. 백만 원의 돈을 갖게 되었을 때? 혹은 천만 원? 혹은 일억 원? 분명 어느 순간, 가난뱅이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시점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부자가 소유해야 하는 돈의 양을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은 분량과 정도의 문제와 비스듬히 겹쳐 있다. 모든 사건들은 당사자에게는 절대적이므로, 그에 대해 타인이 경중을 따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부자와 가난뱅이의 이야기가 하나의 논리적 오류이면서도 오류가 아닌 까닭은 부자든 가난뱅이든 유한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 삶을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단단히 비끄러매기 위해서는 언제나 분량과 정도를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나 절대적으로 가난하거나 부유하지만, 그와 동시에 누구나, 상대적으로 가난하거나 부유하기도 하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멸’은 1인칭 화자인 “나”의 가족에 대한 증오로 시작해서, 고향에 대한 증오, 그리고 고국에 대한 증오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손바닥을 크게 펼쳐 쥐어야 할 만큼 두터운 이 책을 절반가량 읽었을 때, 나는 화자의 증오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 그리고 증오에 사로잡힌 독설과 요설, 장광설로만 소설을 이어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가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이야기가 그럴듯한 서사적 얼개를 갖추어, 여러 사건들로 인한 갈등의 구조를 드러내고, 그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보이지는 않지만 치밀하게 계산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베른하르트의 ‘소멸’은 제목 그대로 모든 것들이 드러나기도 전에 말소되어 가는 과정을, 아니 그 과정마저도 사라져가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작품 내에 희극적인 요소와 비극적인 요소가 고르게 분배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마구 혼재되어있는 증오의 덩어리 그 자체가 하나의 소설이 되는 셈이다.

우리의 삶은 어디까지가 희극이고, 어디까지가 비극일까? 우리는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베른하르트의 또 다른 단편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에서 작중 인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오늘 어떤 작품을 상연하는지 내게 말하지 마시오. 어떤 작품이 상연되는지 한 번쯤 모르는 것도 내겐 무척 재미있는 일이오.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 ……아니, 아니, 어떤 작품인지 말하지 마시오. 말하지 말아요!”



한유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