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작가] 최규석 만화가87년 '6월 항쟁' 그린 작품 폭발적 인기 힘입어 단행본으로 출간

만화에 관심이 없는 20~30대에게도 최규석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등 일련의 작품을 통해, 그는 2000년대 한국 사회, 그 이면에 감추어진 눅눅하고 슬픈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드러냈다. 여기에 화려한 수상 경력은 서른 둘 젊은 작가가 지닌 가능성을 가늠하게 한다.

대한민국 리얼 궁상 만화

1998년 단편 ‘솔잎’으로 서울문화사 신인만화공모전에 금상을 수상하며 등장한 그는 단편 ‘공룡둘리’로 일반에 이름을 알렸다.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 둘리가 손가락이 잘린 공장노동자로 전락한다는 엽기적 내용의 작품이다.

허영심 많던 또치는 동물원에 몸을 팔고, 외계인 도우너는 사기꾼이 되어 길동이네 가족을 위험에 빠뜨린다. 둘리에 관한 ‘슬픈 오마주’인 이 작품은 2004년 ‘공룡 둘리에 관한 슬픈 오마주’란 이름의 책으로 묶였다. 이 책을 두고 둘리의 원작자 김수정은 “앞으로 다른 어떤 작품에도 패러디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말로 이 작품에 추천사를 써주었다.

“사람을 잘 그리고 싶은데, 사람을 구성하는 건 그 사람의 본질, 그 사람이 겪은 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이 함께 작동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작품에 정치, 사회적인 이야기가 들어가는 거죠. 캐릭터 스스로는 (정체성을) 모르지만, 그 캐릭터의 모습은 사회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어요.”

느릿느릿한 저음의 말투로 작가 최규석은 자신의 작품을 설명했다. 사실적이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그의 작품을 두고 사람들은 ‘리얼 궁상 만화’라고 부른다. ‘공룡둘리’ 이외에도 아들 ‘닭돌이’를 재료로 치킨을 튀긴 치킨집 ‘닭사장’의 애달픈 현실을 그린 단편 ‘사랑은 단백질’, 작가 자신의 유년시절을 이야기한 장편 ‘대한민국 원주민’ 등 모두 한국사회 이면의 슬픈 현실이 비춰진다.

그의 대표작 ‘습지생태보고서’에서 ‘습지’는 비만 오면 물이 고이는 반지하 단칸 자취방을 말한다. 이곳에 사는 지방사립대 만화학과 대학생 네 명의 생활 기록이 이 작품의 줄거리다. 사회를 직시하는 특유의 블랙유머는 독자를 끄는 묘한 매력을 갖는다.

“보통 제 만화를 보는 독자는 적극적인 문화향유층이라고 봐요. 제가 느끼기에는 만화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책이나 영화도 많이 보고, 작품이 지루하더라도 참고 보는 게 몸에 밴 분이죠.”

만화로 본 6월 항쟁

그가 지난 해 발표한 작품은 ‘100도씨’. 87년 6월항쟁을 그린 이 작품은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로부터 의뢰를 받아 그렸고, 올해 6월 항쟁을 기념해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6월항쟁 당시 초등학생이던 작가는 수기집과 영화를 보고,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이야기를 만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걸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고 제 삶의 기회를 포기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만화 ‘100도씨’는 고지식한 대학생 영호가 대학에 입학해 광주민주항쟁을 알게 되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겪으면서 진지하게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만화 초반 영호를 주인공으로 작품이 전개되지만, 후반으로 치달을수록 87년 대학가의 풍경과 민주화선언 당시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평소에 책을 잘 안보던가, 읽기 싫어하던 분들도 일단 시작하면 쉽게 넘길 수 있는 책을 만들려고 했어요. 그런 시도를 해 본적이 없었는데, 주인공 성격도 명확하고, 심리를 은유한 부분도 없고. 지난해 발표 때, ‘촛불집회’ 같은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그런 의도가 잘 읽힌 것도 한 요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네. 그래서 온도계를 넣어보면 불을 얼마나 더 때야할지, 언제쯤 끓을지 알 수가 있지. 하지만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지금 몇 도인지 얼마나 더 불을 때야 하는지. 하지만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나라고 왜 흔들리지 않았겠나. 그럴 때마다 지금이 99도다, 그렇게 믿어야지.’(92쪽)

애초 중고등학교 현대사 보충수업 교재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지난 해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올해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애초에 그린 작품에 부록 ‘그래서 어쩌자고?’를 더했다. 20년이 지난 오늘날, 민주화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그렸다.

“촛불집회로 만화가 정치적으로 읽히지 않나?”라는 질문에 작가는 “정치적으로 엮여서 읽히면 더 좋다고 본다. 20년 전 옛날이야기로 읽히기보다, 현재성을 갖는 것이 작가로 더 보람되다”고 말했다.

‘책을 덮고 나면 막연히 ‘아 소중한 민주주의’ ‘오오 위대한 민중’이란 감정이 아닌 단단한 생각들이 남길 바랐다.’(작가의 말 중에서)

“가치란 것은 증명될 수 없고 단지 취향”이지만, 또한 이 작품을 보며 독자가 “단단한 생각들이 남길 바라”는 작가는 앞으로 노동운동 관련만화와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만화, 두 편을 기획하고 있다. 이 묵직한 젊은 작가에게 메시지와 재미, 두 욕심을 모두 담은 만화를 기대한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