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다른남자'법으로 재단 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사려깊고, 단호하게 옹호

그러니까 ‘내 인생의 책’에 대해 쓰면 좋을만한 자리군요.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첫째, 너무 많아서 꼬집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내 인생의 문장’을 말하라면 신이 나서 인용해댈 수 있겠는데 말예요. 둘째, 무리를 해서라도 한 권을 적시(摘示)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그 책 안에 저의 과거와 미래가 쏙 갇혀 버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이건 ‘단 하나’인 것들은 이내 감옥이 되어버리고는 하지요. 셋째, 너무나 당연하게도, 제 인생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읽을 책이 산더미이니 죽기 전에나 한 권 골라놓고 우아하게 끝내면 어떨지.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다른 얘기를 할까 합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는 사실입니다. 먹던 걸 자꾸 먹게 된다는 것과 뭔가 질서를 부여해서 먹게 된다는 것. 말하자면 책에도 ‘단골식당’과 ‘코스요리’가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이런 식입니다.

문학의 본적(本籍)을 사유하기 위해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텍스트인 ‘오이디푸스 왕’과 ‘마태복음’을 함께 읽기, 느슨해진 문장을 단련하기 위해 철사장(鐵沙掌) 수련을 하는 심정으로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서설’과 마루야마 겐지의 ‘달에 울다’를 번갈아 읽기, 어떤 강요도 책임도 없이 책읽기를 즐겨도 되는 때에는 체호프와 레이먼드 카버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들을 내키는 대로 골라 읽기 등등.

이중 첫 번째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 볼까요. 문학의 본적 운운 했으니 책임을 져야지요. 문학의 현주소지야 천차만별이라 말하기 어렵지만 본적지에 대해서라면 가까스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판단불능의 장소’가 그곳일 겁니다. 이 세계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판단들’이 있습니다.

과학적·법적·도덕적·미학적·실용적 판단 등등. 그러나 그 어떤 기준으로도 손쉽게 판단할 수 없는 사건들이 있지 않았을까. 예언을 피하려다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해버린 오이디푸스의 삶,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죽음. 운명(예언)과 대결한 가장 숭고한 사례인 이 사건들을 세상의 어떤 기준으로 감히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문학이 필요합니다. 그 어떤 불완전한 기준으로 난도질하지 않고 사건의 진실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그 사건이 오로지 그 자체의 기준으로만 판단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세간의 숱한 판단들이 무력해지는 지점에서 문학은 비로소 판단을, 그러니까 ‘문학적 판단’을 시작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마음 도사리며 읽은 책 한 권 소개합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다른 남자’(이레, 2009). 현직 법관이기도 한 이 독일작가는, ‘아우슈비츠’에서 ‘아내의 외도’에 이르기까지, 법적 판단이 포착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사려 깊은 조심성과 지적인 단호함으로 옹호하여 저를 떨리게 했습니다. 문학적 판단의 가치를 저는 신뢰합니다. 그리고 이 신뢰가 문학평론가의 본적입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