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뒷마당] 평론가 이명원·소설가 이시백 선생·아내를 만난 추억의 거리

눈이 마주치는 데는 높이에 대한 배려가 있다. 정신의 수위가 다를 땐 잔을 부딪쳐주며 수위를 기다려 주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에 의해 섬들은 좀 더 고요해질 수 있고 세상은 시집 한 권을 더 갖게 되기도 한다.

내가 인사동 술집을 찾기 시작하던 때는 문단에 데뷔(2003년)한 그 다음해였다. 나는 그 때 시적 과잉상태에 있었다. 풀어 얘기하자면 자기 상처를 들춰보고 어루만지느라 자기연민에 사로잡힌 채, 시인이라는 명패를 졸부처럼 품에 넣고 다니던 특이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는, 십 수 년을 지각해 입학한 대학에서도 문단에서도 스스로를 쌀밥에 든 돌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보통은 등단 전에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동료나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문인으로서의 교양뿐 아니라 삶의 태도들을 습득하게 된다.

자고 일어나 보니 시인이 돼 있던 나는 그렇지를 못했다. 먼지 내게 털어봤자 학력이라고는 고등학교 중퇴가 다였으니 문인으로서의 교양이나 관계성을 다질 기초 훈련을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시적 상태의 과잉과 교양 결핍으로 인한 난감함은 술자리들마다 나를 서둘러 취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날이면 후회와 자책과 괴로움과 외로움이 늘 곁에서 자리를 빛내주고는 했다.

내가 평론가 이명원을 인사동에서 처음 만나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의 이름은 문단 뿐 아니라 지식인 사회를 한때 술렁거리게 했었는데 덕분에 나도 여기저기서 그의 이름을 들어 알고는 있었다. 그는 폭력적인 교권에 의해 모교에서 쫓겨나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학위 과정을 마저 밟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그때 대학 1학년생이었는데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이 계기가 되어 그와 술잔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월초의 인사동은 새로 생긴 간판들과 아직 찬 기운이 골목마다 배회하고 있었다. 우리가 술잔을 부딪치던 곳은 나처럼 문학이 과잉되어 있던 ‘시인 학교’라는 술집이었다. 그 때 같은 자리에는 시인이 한 명 더 있었고 이명원 씨와 그의 남자후배까지 모두 네 명이 앉아 있었다.

술집 벽면마다에는 세탁소의 옷들처럼 시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시가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가듯 술집도 한산했고 우리는 조금씩 취해갔다. 무슨 얘기들을 주고받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등단년도가 나보다 십 년이 위인 그에게 나이가 같으니 말을 놓자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짐작컨대 내가 늘 끼고 다니던 무지와 무례는 그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술이 약한 그는 포장마차까지 우리와 동행해 주었지만 곧 골목의 어둠 어딘가로 잠입해버렸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가방도 놓고 도망쳐버리는 것은 그의 유일한 술버릇이었다.) 하지만 그의 후배만은 재미없었을 술자리를 같이 해 주었다. 포장마차도 한산했다. 손님이라고는 취한 남자와 한 여자뿐이었다. 대화의 초점을 끝내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우리는 일어서려 했다.

그때 술 취한 남자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이명원 씨의 후배에게 아는 체를 했다. 때문에 우리들의 술자리는 더 이어졌다. 이미 취할 만큼 취한 우리가 다시 포장마차에 앉게 된 것은 이성(理性)을 마비시키는 술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이성(異性)에게는 한없이 약한 수컷다움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그 이성의 미모와 매력은 제법 수준급이었다.)

아무튼 그 후로도 이명원은 시적 과잉에 사로잡힌 불안한 영혼을 만나주었고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었으며 술잔을 부딪쳐 주었다. 나의 ‘시인 호르몬 과다 분비 증상’도 아주 조금씩 차도를 보였다.

이명원 씨를 알게 된 그 무렵 나는 인사동에서 또 한 사람의 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소설가 이시백 선생이다. 그 분을 만나게 된 건 청소년 문예지의 편집위원 모임 자리에서였다. . .

나의 불우가 유난히 커보이던 그 무렵, 술자리에서 듣게 된 그분들의 살아온 얘기들은 나의 과잉된 불우에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했다. 나도 답례처럼, 쓸데없이 진지하고 따분한 얘기들로 익어가는 술자리의 분위기에 가끔 찬물을 끼얹어 주기도 했다. 그래도 그 분들은 술잔의 수위를 기다려 주었다.

이시백 선생님의 이야기들은 술자리를 언제나 빛나게 만들었다. 불우한 시대를 고스란히 몸으로 건너오면서 얻어낸 얘기들은 객관적으로는 결코 웃기지 않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을 통과하면서 웃기는 얘기가 되어 있었다.

그 분은 한 동안 소설을 쓰지 않으셨다고 했다. 3천 매가 넘는 장편소설을 도둑질 당했던 것이 펜을 낚싯대로 바꿔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분의 소설을 읽으며 그분에 대한 존경과 놀라움은 가중되었다. 어떻게 문단은, 이처럼 훌륭한 소설을 쓰시는 분의 이름을 지방 문예지로 갓 등단한 작가보다 더 낯설게 방치할 수 있었을까.

문단의 중심은 외각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분의 어떤 얘기 속에도 원망이나 분노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덩달아 청탁이 거의 들어오지 않던 내 상황이 불우해 보이지 않았다. 누구라도 이런 분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설사를 참는 일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내가 인사동에 입문하고 6년이 지났다. 평론가 이명원은 학생들 편에서 재단과 맞서다 해직교수가 되었지만 다음 달이이면 애 아빠가 된다. 이시백 선생님은 그간 두 권의 소설집을 펴냈고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을 택하셨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오게 될 장편소설을 기다리고 있다.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했고 동화 한 권과 시집 한 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지금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여자는 5년 전 이명원을 처음 만나던 날 포장마차에서 만난 그 여자다. 참고로 그녀는 이명원의 대학 후배다.

나도 이제 문인으로서 후배들을 맞이할 만큼의 세월을 보낸 것도 같다. 하지만 문인들이 주요 고객이던 술집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으며 술잔의 수위를 가늠해 보고 기다려 주던 자리들도 줄어들어 간다.

정신의 수위에 대한 배려와 인내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앉아 있게 될까. 경쟁과 질투와 소문과 잡담들만이 난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김일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