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무지한 스승'지적 능력의 평등함 통해 서로 공감하며 소통하는 세상 꿈꿔

수업시간에 내내 졸기만 하던 아이였다. 일찍 정규 학교를 그만두고 오토바이를 타고 이리저리 형들과 함께 놀러 다니던 아이였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다른 아이들처럼 얌전하게 머리를 굴리는 것이 자기 몸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아이였다. 나는 그가 잠을 자고 졸고 다른 짓을 하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이가 번쩍 손을 들더니 질문을 던졌다.

“기호, 영원한 사랑이란 존재하는 것인가요?”

그날 나는 지금까지 해본 것 중에서 가장 심오하고 철학적인 수업을 철학 근처도 못 가본 아이들과 함께 하였다. 우리는 영원에 대해서 토론하였고,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서로의 견해를 견주어보았다. 아이들과의 이 토론에서 내가 던진 감탄사는 이런 것이었다.

“그건 부처가 한 이야기잖아.”, “그건 데카르트의 이야기잖아.” 아이들의 견해 안에 이미 모든 ‘지적 스승’들의 이야기가 다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스스로 놀라워하였다.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이것은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지적 해방이었다. 이 해방은 단 한마디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읽고 나서야 이 질문의 위대함을 알 수 있었다. 우연히 아이들의 견해를 들어보기 위해 던졌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 질문과 함께 아이들은 자기들도 영원과 사랑에 대해 자기 견해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였다. 랑시에르는 이 지적인 능력의 평등, 이 평등에 대한 긍정을 해방이라고 부른다.

무지한 스승은 설명을 통하여 학생들이 배워도, 배워도 스승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제자를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여 바보로 만드는 그런 스승이 아니다. 무지한 스승은 학생들 스스로 자신들에게 배우고 주장할 능력이 있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스승이다.

이 무지한 스승은 자신의 제자들이 평등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스승이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보편적 가르침이라고 부른다.

보편적 가르침은 네덜란드에서 혁명적인 교육 실험을 한 자코베의 사례에서 랑시에르가 따 온 것이다. 자코베는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모르는 프랑스인 선생이었다. 프랑스어를 가르쳐달라는 네덜란드 학생들의 요청에 그가 한 것은 네덜란드-프랑스어 대역 책 한권을 던져주는 것뿐이었다.

기적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학생들이 그 대역을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하면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프랑스어를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단지 프랑스어만을 학습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보편적이고 스승과 평등한 능력에 대해서 긍정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 가르침’인 이유는 “한 명의 무지한 자가 할 수 있었다면, 다른 무지한 자들도 언제나 이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 능력의 평등함을 통해 무지한 자들은 “아는 것을 넘어 행하게”되고 “행하는 것은 소통하는 것”이며, 소통을 통해 “서로 공감하며 해방된 자들의 세상”을 꿈꿀 수 있게 된다.

한국 사회가 소통이 꽉 막힌 불통의 사회라고 한다. 국민들이 가진 평등한 지적 능력을 인정하기는커녕 아예 광장을 틀어막고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작년에는 콘테이너 산성이더니 올해는 차로 만든 물샐틈없는 벽이 세워졌다.

주권자의 능력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 사회에서 정치는 고사하고 통치조차 가능할 리가 없다. 누가 정녕 무지한가. 아니 누가 정녕 무지해야하는가? 밤마다, 주말마다 생고생하는 국민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엄기호 /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