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작가]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 출간 오현종 소설가자전적 경험 모티프, 기존 말하기 벗어난 정통 리얼리즘 서사로 승부

‘나는 지중해나이트 수족관 속에서 탬버린을 흔들며 춤을 추는 인어입니다. … 나는 갈 곳이 없었어요. 그때 나를 받아준 게 지중해나이트였습니다. 오늘도 나는 술에 취해 “저 인어를 찜쪄먹자”고 달려는 손님들 앞에서 탬버린을 흔들며 요염하게 춤을 추고, 하루 영업이 끝나면 남편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 발칙한 상상력은 다분히 도발적이고 완숙한 소설가에게나 가능한 것 일터다. 동화부터 영화, SF에 이르기까지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짓는 이 세헤라자드는 올해로 등단 10년 차를 맞은 작가 오현종이다.

동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세헤라자드

베 틀에서 옷감을 짜내듯, 차곡차곡 지어가는 그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보면, 세상의 온갖 이야기가 소설의 형식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운의 여인 라푼젤이 배꼽춤을 추는가하면(단편 <상추, 라푼젤>), 인어는 지중해나이트 수족관에서 몸을 팔며(단편 (수족관 속에는 인어가>), 되바라진 헨젤과 그레텔은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살 만큼 살았잖아”라고 말하며 노인들을 유기시켜버린다(단편 <헨젤과 그레텔의 집>). 블록버스터의 대명사, ‘007 시리즈’를 그의 이야기 보따리에 넣으면 주인공은 본드걸로 바뀐다. 장편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에서 주인공 미미는 이렇게 외친다.

“저는 007보다 훌륭한 스파이가 될 수 있는데, 왜 폐기처분되어야 하죠?”(57쪽) “근데 왜 본드걸말고 본드보이는 없죠?”(134쪽)

첫 장편 <너는 마녀야>를 비롯해 재작년 내놓은 장편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까지 그가 빚어내는 찰진 입담에는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다. 자신의 고민과 체험을 각종 장르 문학의 코드로 버무려 내는 작가는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가 ‘허구’임을 못 박아두었다. 때문에 작가 오현종은 순수 문학에 장르적 코드를 도입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혔다. 작가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 퓨전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그런 작업들이 재미있었고, 90년대 일상적인 소설이 주류를 이루면서 정체된 분위기였어요. 또 당시 제가 젊은 작가였고, 도전적인 작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2000년대 중반 이후 몇몇 젊은 작가들이 소설에 장르적 기법을 도입하면서, 이제 ‘장르적 요소’는 하나의 트렌드를 이루었다. 최근 몇 년간 주요 문예지에 ‘장르문학’ 또는 ‘장르적 요소를 차용한 순수문학’특집이 실렸다는 것은 이런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장르적 요소를 작품에 투영하는 작업은 다른 분들도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더 나아갈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전 제가 읽고 싶은 작품을 쓰거든요. 형식적인 실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안 쓰는 걸 쓰고 싶어요.”

신간은 정공법

그래서일까. 신간 <외국어를 배우는 시간>에서 작가는 기존의 말하기에서 벗어나, 정통 리얼리즘 서사로 작품을 이끌어 간다. 일종의 성장소설인 이 작품은 20년의 시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가 1980년대 후반, 청소년들의 고민을 말한다. 청소년 문예지 <풋>에 작년 여름부터 올해 봄까지 1년간 연재한 작품이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정공법을 택했다”고 말했다.

“요리로 치면 예전에는 간도 많이 하고 장식도 화려한 음식을 내놓고 싶었어요. 요리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이번에는 날 것 그대로, 재료의 맛만 갖고 승부를 보고 싶었지요.”

‘요리의 재료’에 해당하는 이야기의 모티프는 작가의 자전적 경험에서 따왔다. 1989년 외국어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외고 1세대’ 작가다. 그는 이때의 기억을 되살려 신간을 썼다. 작품 말미의 붙은 편지 역시 작가가 학창시절 친구에게 받은 편지를 부분 수정해서 옮긴 것이다.

서울의 변두리 여자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는 이유로 3년 내내 따돌림을 당하던 주인공 김은효는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로의 진학을 피하기 위해 한 외국어고에 입학한다. 비쩍 마른 체형에 입속엔 치아교정기, 여드름이 고민인 여학생이 바로 주인공 은효다. 체력 꽝, 매력 꽝이자 ‘공부가 제일 쉬웠던’ 그녀지만, 공부로든 집안 배경으로든 난다 긴다 하는 아이들만 모여든 이 학교에서 잔뜩 주눅이 든다. 지금까지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은효는, 원어민 강사의 외국어 수업도 척척 알아듣고, 입학 전에 이미 고등학교 1, 2학년 과정쯤은 다 마치고 온 똑똑한 아이들 틈에서 이방인이 된 기분으로 학교생활을 시작한다.

교육을 통한 부의 되물림, 영어 조기교육, 외국에 대한 동경 등 주인공 은효가 학교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은 20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작가는 “작품 속 ‘외고’라는 공간은 교육에 관한 고민이나 갈등이 증폭되기 쉬운 공간”이라며 “내가 고등학교를 다닌 그때의 교육 현실과 지금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학창시절은 가장 빛나는 시절임과 동시에 가장 불안한 시기다. 작품 속 아이들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수재이자, 권력자의 자손이지만, 그럼에도 입시 스트레스를 못 이겨 조기유학을 가거나, 자퇴를 하거나 때로 자살하기도 한다. 물론 대다수의 아이들은 무난하게 명문대를 합격한다. 작가는 “이 시절 아이들의 빛과 어둠을 다 보여주고 싶었”노라고 말했다.

외고 불어과에서 수업 받는 것과 타인에게 예의를 차리면서도 ‘예의의 어긋남’ 때문에 상처받기 쉬운 여고생인 점, 대학입시에서 떨어져 노량진 고시촌으로 들어가는 장면 등은 모두 작가의 자전적 경험에서 비롯됐다. 인생의 가장 힘든 고비 중 하나를 겪은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언젠가 만약에 내가 소설가가 된다면 이 시절에 대한 얘기를 꼭 써야지’라고 생각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까지 작품을 통해 보인 기발한 상상력, 재미있는 입담과 달리 작가는 “상처받을 때와 절실한 마음이 들 때, 구원의 한 방법으로 소설을 쓴다”고 말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신간은 이미 오래 전에 나왔어야 할 작품인 듯했다. 작가는 “이전 작품의 400매 가량을 썼다가 중단한 적이 있다. 이야기가 보편성을 가질지 고민하다가 계간지에 연재 하면서 다시 쓰게 됐다”고 말했다.

오현종의 말하기 방식은 리얼리즘으로 ‘리턴’한 것일까? 그는 7월 중 창간하는 한 출판사의 문학웹진에 정통 리얼리즘에 장르적 요소를 도입한 장편을 연재할 계획이다. 작가는 “형식 실험과 정통 서사를 다양하게 거치면서 변화의 증폭이 넓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