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뒷마당] 강정·박민규 등 음악이라는 수공업하며 또 다른 자아 확인

음악과 문학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말하기 쉽지 않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문인들은 거의 다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참으로 많다. 특히 시인들에게서는 시 자체를 음악으로 받아들이는 낭만적 정서도 흔히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시는 음악이 아니어서, 시를 음악적이라고 부르기는 해도 시인을 음악적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물론 음유시인이라는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을 법한 단어도 있긴 하지만)

저 자신이 음악인이기도 하고 음악비평가이기도 한 오스트리아의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움이란 일체의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형식이며 거기에 채워지는 내용에 따라서 다양한 여러 목적으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형식 자체는 그 자신 외의 다른 어떤 목적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



아름다움은, 그것이 아무 감정을 환기시키지 않더라도, 사실상 우리가 보거나 관찰하지 않는 경우에도 아름다우며 계속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아름다움은 직관하는 주체에 쾌감을 주는 결과가 되는 것일 뿐, 주체의 쾌감에 의해 아름답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말을 수긍한다면, 우리는 음악이 아름답기 때문에 연주하고 즐기는 것이지, 아름다워지지 위해 음악을 듣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분야에서 '겉멋'은 서로에게 도움이 안된다는 말이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능숙한 사람이 대신해주고 나는 그 감동만 얻어가면 되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에, 사실 '취미로서의 음악하기'는 소박한 (그리고 때에 따라 궁상인) 수공업일 뿐인 것이다.

그렇긴 해도 어떤 경우는 수공업을 가장 창조적인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연필을 깎고 종이에 눌러 쓰는 일, 전자책보다는 종이의 질감을 선호하는 일, 이런 저런 생각을 덧대어 커다란 조각보의 생각 덩어리를 만드는 일, Delete 키를 눌러 그냥 한 글자 지워도 될 것을 굳이 프린트해 보고 이리저리 가늠하는 일... 이런 아날로그주의자들이 문인들이고, 그 중엔 음악이라는 수공업을 하는 문인들도 있다.

젊은 작가로만 한정지어 봐도, 소설가 김연수와 시인 강정의 '수와 정' 듀엣이 그렇고, 지미 헨드릭스 추종자인 소설가 박민규, 펑크록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던 시인 이준규, 키보디스트였던 시인 정재학, 클래식 기타 잘 치는 시인 장만호, 베이스와 기타를 번갈아 잡고 있는 소설가 한유주 등이 내가 알고 있는 솜씨 좋은 수공업자들이다.

물론 자주 그들의 수공예품을 접할 수 없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뭐 그건 그들 공방(工房)의 일이니 참견할 일은 못된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기 일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으면서 그냥 즐기고 있을 뿐이니까.

홍익대 앞에서 열린 <핑퐁> 출간 기념 콘서트에서 직접 노래하는 박민규 작가


말러(Mahler)에 박식한 시인․평론가 서동욱은 어디선가 '음반의 선택에 관해 한 가지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떠들썩한 명반을 물신숭배하기보다 어떤 음반이 되었건 곡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을 쌓아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었는데,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오로지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야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 자신도 기타와 시타르, 미디음악으로 그 수공업의 대열에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수공업은 내게 '음악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 또한 질서'라는 걸 깨닫게 준다. 악곡을 벗어나 음악은 있을 수 없고 좋게 들릴 리 없지만, 정해진 질서 안에서 유영하다보면 틀을 벗어나 또한 자유로움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무엇보다 그들의 문학 작품이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그들의 수공업이 사랑스럽다면 그건 그들의 문학 작품이 사랑스러워서일 것이다.

프로도 아니고 남에게 내보일 실력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음악적 놀이는 또 다른 자아를 확인시켜 준다.

위대한 첼리스트 카잘스의 자서전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내겐 아버지처럼 물건을 만드는 솜씨도 없으며 아주 단순한 것도 손으로 만들지 못한다. 최근까지도 나는 농가에서 만든 치즈병마개도 열지 못했다. 그것에 실망하여 나는 사랑스러운 내 아내 마르타에게 말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내 손으로 아무것도 못한다오'라고. 그러자 아내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며 방 한구석에 세워져 있는 첼로를 가리켰다.'

아마도 문학은 작가들에게 카잘스의 첼로와 같은 것이 아닐까. 자기가 못하는 걸 하다보면 또한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게 뭔지를 깨닫게 되는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아름다움은 하나의 주광성과 같아서, 예술가들은 그곳을 향해 가지를 뻗는다. 그것이 문학을 포함한 예술의 정언이라면, 흔히 말하듯 불편한 방식으로 문학하기를 추구한다는 건 비평가들이 바라보는 시각일 테고, 사실 작가들은 (그 과정이 지난한 일일지라도) 자신에게 가장 행복한 쪽을 향해 길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꼭 문학이든 아니든 혹은 익숙하든 아니든, 삶의 아름다움이야 말로 모두의 로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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