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외모 지상주의 사회의 단면 보여줘

심신이 지쳤을 때는 한국소설을 읽는다. 소외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 두려움에 발 밑이 캄캄할 때, 가슴 속이 물기 하나 없이 바삭거릴 때, 모국어의 힘이 필요할 때.

한국소설을 읽는 것은 제 고장에서만 나는 향기로운 나물을 먹는 것과 같다. 책을 읽으면서 점차 시든 원기가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이 공감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소설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나온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신간소설이다. 지난 칠 월, 나는 더위에 시들시들해진 배추처럼 축 늘어져서 책의 이 첫 장을 넘겼다. 읽는 내내 감정의 넘실거림 때문에 숨을 골랐고,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는 몸속까지 바람이 통한 듯 청량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의 표지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이다. 그런데, 어딘지 낯설다. 원작에서는 구석에 위치했던 난쟁이 추녀가 정면에서 단독으로 조명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녀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공주에 가려 보이지 않던 난쟁이 추녀.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곳은 팔십년 대 서울이다. 비틀즈와 골목길, 낡은 호프집, 고궁에서의 데이트. 이 익숙한 소재의 한 편에 ‘특별하다 싶을 정도로 못생긴 여자’가 등장한다. 어째서 지금껏 추녀가 로맨스의 주인공인 이야기는 읽어보지 못했던 걸까.

대한민국의 이십대 여성으로서, 이 질문은 꽤나 아픈 것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문득, 내 속에 벌겋게 벌어진 상처를 마주했다. 이 땅의 다른 여자들처럼 나 역시 스스로의 몸, 외모와 한 번도 화해를 이루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미(美)와 추(醜)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저는 오로지 스스로의 태생만을 평가받아온 인간입니다.’

소설 속 그녀의 고백은 우리가 갇힌 이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외모는 가치이며 경쟁력이고, 자본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가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작가는 말한다. 그저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습성이 우리를 여기에 이르게 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구원이 될 어떤 것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사랑뿐이라고.

사랑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잠긴 문을 열고, 빛을 드러낸다. 누군가와 함께 손을 잡고 길을 걸을 때, 전화기 너머로 작은 목소리로 사소한 일들을 이야기 할 때, 마침내 누군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댈 때. 우리는 약자도 아니고 패자도 아닌, 사랑을 하는 인간이 된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 이라는 구절은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잠언이다.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을 그만두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갇힌 무력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라벨의 음악에서 제목을 따 온 이 소설은 특히 다양한 팝음악과 조우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소설을 위한 BGM 음반까지 있으니, 특별한 독서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소설의 마지막에 붙어 있는 Writer's cut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수억의 시간과 공간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실현되지 못한 인생의 가능성들이 하나의 환(幻)이 되어 가슴을 울린다.



정한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