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뒷마당] '책의 유혹' 받아들이는 다양하고 개성적인 모습들 보여

가끔 책이 많은 작가의 서재를 바라보고 있으면 참 부럽다. 그렇지만 무한히 부러운 것만은 아니어서, '많은 책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부러움 뒤에는 '설마 저게 다 그의 지식일 리가...'라는 안도 아닌 안도가 뒤따른다.

요즘은 덜하지만, 책에 실려 있건 기사에 실려 있건, 빼곡히 꽂힌 책장을 뒤로 하고 작가들이 포즈를 취하는 것은 오랫동안 어떤 종류의 문학적 트렌드였다.

당연하게도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타인의 글을 읽지 않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권수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서재를 가지고 있다.

나 자신의 일화를 잠깐 말해보면, 출입문을 제외하고 단칸방의 네 면 모두를 천정까지 책으로 쌓아놓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이사 다닐 때마다의 고통은 둘째 치고, 어느 날 책들이 잠자고 있는 내게 무너져 내려서 (책은 한 방향으로만 높이 쌓아올리면 필연적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기억이 있다.

'책들이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내 품으로 쏟아져 내린 그들의 애정에 깊이 감복하면서도, 그 이후로 나는 책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었는데, '두 번 읽을 책이 아니라면 영원히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라는 지금의 생각도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시인의 경우이고(물론 많은 책을 가진 시인들은 아주 많다), 소설가와 비평가들은 이와 다르다. 읽지 않고 있어도 '자료'로서 언젠가는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 대신에 작은 물건들과 사귀게 되었다. 산책을 나갈 때 들고 가는 지팡이, 우유를 마실 때 쓰는 찻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꽃병, 과일이 담긴 그릇, 재떨이, 녹색 갓을 쓴 책상 전등, 인도에서 가져온 청동으로 만든 작은 크리슈나 신상, 벽 위에 걸린 그림들, 이런 물건들이 나와 교제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끝으로 가장 좋은 상대를 말하자면, 내 작은 집의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많은 책들이다. 그들은 내가 깨어나고 잠이 들 때, 식사할 때나 일을 할 때, 좋은 날에나 궂은 날에나 내 곁에 있다.' (헤르만 헤세, 『정원 일의 즐거움』중)

헤세의 것처럼 친구와 같은 소박한 서재도 있고, 발 디딜 틈조차 없는 난삽한 서재도 있으며,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서재도 있다. 내가 본 몇몇 사례는 이렇다.

누구는 구입하는 책마다 비닐겉장을 일일이 씌우는 번거로움을 마다 않는다 (그래서 그의 서재는 늘 번쩍거린다). 누구는 책을 구입하자마자 띠지와 겉장을 즉시 벗겨 버린다. 누구는 철학/문학/과학으로 분류하여 개가식 풍의 서재를 만든다. 누구는 다 읽은 책은 버리거나 선물하고, 가급적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구는 인근의 도서관이 자신의 서재라고 생각한다.

여하한, 작가의 서재는 그들의 글쓰기만큼이나 다양하고 개성적이다. 전집류로 책장을 채운다거나, 헌책방을 들락거리며 헌책으로만 구성한 책장을 본 적도 있다.

예전에 어느 잡지사에서 이런 앙케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자신이 가지고 가고 싶은 한 권의 책은?' 그런 설문을 받고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거기에 답하지 못했다. 단 한 권이라니. 그건 내가 좋은 책이라고 여기는 수많은 책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고, 그것들 중에 하나만을 꼽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런 선택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작가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 틀림없다. 이런 종류의 애정은 남녀간의 것과는 달리, 무한히 여러 갈래로 애정을 쏟고 소유해도 하등 문제될 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서로 다투어 가며 <포르티아의 꿈>을 암기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사해에 빠뜨려진 악마의 역할을 내가 맡고, 그보다 좀 애처로운 아드리메레히 역할은 누이동생이 맡았다. 무서운 그러나 어음(語音)이 좋은, 서로 주고받는 저주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우리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악마의 말로 인사를 교환했다. (...)

이와 같이 어린이들이나 민중들은 위대한 것, 숭고한 것을 유희화하고 도화극으로 변화시킨다. 그렇지도 않으면, 대체 어떻게 그런 위대하고 숭고한 것을 유지해 나갈 수가 있겠는가?' (괴테, 『시와 진실』 중)

꽂힌 책들의 책등을 가만히 손끝으로 훑어보는 일은 물론 행복하지만, 책은 쌓아두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벽을 장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책이 위대하고 숭고해지는 순간은 그것을 읽은 자가 그 안의 내용을 이해하게 되는 그 순간뿐이다. 조금 유보해서,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곁에 두고 읽어나가는 그 순간뿐인 것이다.

그러니 사실 많은 책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는 것은 매우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도, 많은 작가들은 지금도 계속 책을 수집하려 애쓰고 있다. 왜 그럴까?

내 자신은 그래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 자신이 도서관장이었던 보르헤스가 '천국은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한 말이나, 평생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던 조선시대 선비 이덕무(李德懋)가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은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너무나 비슷하다'라고 한 말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릇 글을 쓰는 자라면, 책은 천국, 즉 종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난 좀더 당신을 원해요'라는 그런 신파적이고도 한없는 연애감정으로, 모두들 기꺼이 (책의!) 유혹을 받아들일 심정인 것이다.



조연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