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침묵의 세계' 데시벨 높여가는 이 세상에 마음 할퀴인 당신
차를 저만치 세워두고 외진 선착장을 천천히 걸을 때였다. 새들이 노을에 젖어 둥지로 돌아가고 있었고 구름이 불에 달군 쇠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바다가 눈물처럼 차오르고 있었다. 세계가 일순 정지하는 듯했다.
집들은 소음을 안에 가두고 창문을 닫은 듯 했다. 귀가 멍해진 듯, 진공 속을 걷는 것 같은 느낌. 움직임도 없이 부풀어 오르고 있는 바다가 숨을 들이마시듯 주변에 쌓여있던 소음들까지 빨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나는 바다가 마련해준 고요 속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느꼈다. 침묵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고 둘 사이에 앉아 우리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 후 며칠, 처가와 처가의 고향사람들까지 둘러보느라 나는 천오백 킬로가 넘는 주행을 해야 했다. 낯선 사람들에게 쉽게 피로를 느끼는 나로서는 못 견디게 피곤하고 짜증스러운 시간이었을 텐데 아내와 나 사이에 이상하게도 조금의 갈등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고요한 선창에서 잠깐이나마 침묵의 말을 주고받은 덕분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아주 오랜 시간을 같이 왔고 같이 간 사람들처럼. 막스 피가르트가 <침묵의 세계>에서 들려준 침묵의 힘을, 저녁이 내리는 고향 바닷가에서 나는 오롯이 느낄 수 있었으니, 그는 말한다. '함께 침묵할 줄 알 만큼 서로를 사랑하는 두 친구는 행복하여라.'
이 책은 형상과 말(言), 예술과 역사, 사랑과 몸짓, 시간, 죽음, 자연, 얼굴, 사랑, 농부, 시, 동물, 그리고 명상과 기도 등 침묵과 관계된 많은 것들에 대해 신비한 언어로 얘기하고 있다. 페이지마다에는 잃어버린 아틀란티스가 심연에서 다시 솟아오르고 있는 것만 같다.
소음을 담는 거대한 그릇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사람들과 나누었던 말들이 다음날이면 씁쓸하게 입안에서 맴돌 때, 사랑하는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을 찾을 수 없을 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도 뭔가 허전할 때, 동물들이 사랑스러운 이유를 알고 싶을 때, 신을 느끼고 싶을 때, 음악이 어디서 어떻게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을 때 막스 피가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펼쳐보길 바란다. 물론 쉽고 간명한 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빠져있는 근원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침묵이다.
침묵은 오늘날 유일하게 실리와 효용성의 세계 그 바깥에 있으면서 효용성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보호하는 휴식처 역할을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소음 속에 지쳐가고 있는가. 아침을 우는 알람소리와, 저 수다스런 텔레비전과, 바람의 숨소리와 새들의 속삭임을 지워버리는 자동차 경적과, 끊임없이 울려대는 휴대전화 벨소리와 대지를 파헤치는 굴삭기 소리와, 매일매일 쏟아지는 무의미한 글자들. 그리고 마음 없는 말, 말, 말, 말, 말들!
데시벨을 높여만 가는 이 세상에, 거기에 마음이 할퀴인 당신에게 <침묵의 세계>는 속삭인다.
"침묵해요. 내가 당신 말을 들을 수 있도록!"
김일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