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숫잔대

진한 추위가 몰아치고 난 산과 들의 풍광은 제법 쓸쓸하다. 이제 풀들은 말라 스러지고 혹은 사라지고, 물들었던 나무들의 잎새마저 마르거나 혹은 떨어지거나. 물가의 생명들은 더욱 절박하다. 한여름 그 풍요롭던 생명의 잔치는 이제 흔적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땅에는 죽은 듯 침잠하고 새봄을 준비하는 생명들이 있기에 갑작스런 추위에 의연해 본다. 대신 막바지 가을을 바라보며 마음이라도 깊어지도록 스산한 물가를 걷고 있자니 지난 여름 그 자리에 자랐던 숫잔대가 떠오른다. 그 아름다운 꽃빛이 선연하다.

숫잔대는 우선 꽃색이 곱다. 남색도 보라색도 아닌 그 꽃의 빛깔을 어찌 표현해야 하는지 절절매고 있는데 누군가 울트라 마린 블루와 비슷하단다. 그 색을 찾아보니 비슷한 듯도 한데 숫잔대의 꽃색이 훨씬 맑다.

우리말로 표현할 더 좋은 말이 없을까 고민해 보았는데 만일 숫잔대가 누구나가 알 만큼 유명하다면 그냥 숫잔대 꽃색이라고 이름 지어주면 좋겠다. 하늘의 빛깔을 따서 하늘색이라고 이름 짓듯이 말이다.

숫잔대는 초롱꽃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키는 무릎에서 허벅지 높이쯤 자란다. 꽃은 줄기 끝에 총상화서가 만들어지고 쭉 달리는데 모양은 초롱꽃과에 속하지만 초롱 같은 전체적인 통모양은 아니고 매우 독특하다. 밑부분은 좁은 통으로 붙어있지만 꽃잎이 먼저 둘로 갈라져 아래위로 나뉘고 아래 꽃잎은 3갈래로 깊이, 위쪽은 2갈래로 더욱 깊이 갈라져 있다. 한여름에 핀다.

다른 이름으로 진들도라지, 잔대아재비, 습잔대라도도 한다. 이 숫잔대가 속하는 집안 이름인 속명이 로벨리아(Lobelia)인데 요즈음 꽃집에서 파는 식물 가운데 작은 분에 키우는 로벨리아는 대부분 로벨리아 풀겐스라는 중앙아프리카 식물에서 육종된 품종들인데 바로 숫잔대와 같은 집안이다. 잎은 피침형으로 다소 촘촘히 어긋나게 달리며 윗부분 잎은 점점 작아지면서 마치 포엽처럼 꽃 밑에 달린다.

우리나라엔 남쪽 바닷가와 섬지방이 아니면 어디는 볼 수 있다. 주로 햇살이 잘 드는 습지나 냇가 근처에 있다. 아주 흔치도 않지만 너무 귀하여 보호받을 정도도 아니다. 쓰임새는 관상적 가치가 우선일 듯 싶다.

먼저 같은 집안의 원예종 로벨리아가 이미 시장에 나와있듯이 꽃이 좋다. 개화기가 긴 것도 장점에 든다. 하지만 원예종보다 키가 삐죽하게 크게 자라니 화단이나 화분에 심기보다는 꽃꽂이용 또는 습지 주변의 식재용으로 심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한방에서도 이용했다. 뿌리 또는 뿌리 달린 식물체 전체를 산경채(山梗菜)라 하며 썼는데 약용한다. 가래를 없애고 열을 내리고 독을 없애주는 효능이 있어 기관지염을 비롯한 여러 증상에 처방한다고 한다.

겨울이 오면, 산과 들에서 직접 풀과 나무들을 만나지 못하는 대신 이렇게 사진을 찾아보며 식물들을 추억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