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무라카미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시간의 허망함과 동시에 희망의 상징 완벽하게 결합

지식인의 서고에는, 사실, 읽지 않은 책들이 가득 쌓여 있다.

잠들어 있다고 해도 좋을 그 책들은 그러나 어느날 불현듯 하나, 또는 두 개의 문장으로 깨어날 것이다. 문득 다 꺼내다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 책들을, 지식인은, 그 만일의 순간을 위해서 쟁여놓는다.

눈이 가는 게 중요하다. 어느 책에 눈길을 줄까.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푸른색 책등에 눈길이 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윌리엄 포크너의 <8월의 빛>과 더불어, 내가 유일하게 몇 번씩 읽은 소설책. 무라카미 류가 좋으냐,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으냐, 는 질문을 가끔 받기도 하고 아마 한 적도 있는 것 같다.

그 질문은 마치 콜라가 좋으냐, 사이다가 좋으냐, 하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또는 롤링스톤즈가 좋으냐, 비틀즈가 좋으냐, 하는 질문하고도. 나는 롤링스톤즈보다는 비틀즈를 좋아하지만, 하루키보다는 단연 류를 좋아한다.

압도적으로. 그 이유는, 글쎄, 살살거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야할까. 그렇다. 지금은 약간 극우적 성향을 보인다고도 하는 류는 절대 살살거리지 않는다.

몇 개의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약에 취해 혼음을 하는 젊은 아이들의 방에 뒹구는 말라르메의 시집을 묘사한 대목도 왠지 오래 기억난다. 류가 그 시집을 들어서 기둥에 붙어있는 나방을 내려치는 장면은, 이 소설이 상징하는 바를 압축하고 있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서 내가 본 소설 중에 가장 아름다운 끝 장면을 지니고 있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유리 파편을 꺼내서 보는 장면이다.

"가장자리에 피가 묻어 있는 유리 조각은 새벽 공기에 물들어 투명에 가깝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다." 자신의 피가 묻어 있는 이 유리조각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푸른빛은 시간의 허망함의 상징이며 동시에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둘을 이렇게 완벽하게 결합시켜놓은 상징을 제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하나의 작품만으로도, 류는 위대한 소설가다.

내게 아직 청춘의 주파수가 흥건할 때, 이 소설은 곳곳에서 수천 볼트의 전압으로 나를 전율시켰던 것이 여전히 생생하다. 멋진 광경을 봤을 때처럼, 이 문장을 봤을 때의 상황이 눈에 그려진다.

나는 방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노란 장판의 방바닥에는 얇은 이불이 깔려 있었다. 무라카미 류는 "1970년대 중반, 일본은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내고 그 대신에 뭔가를 잃었다"고 말하고 있다. 상실감. 아마도 나는 그 때 틀림없이 모종의 상실감에 젖어 있었나 보다.

이 책을 추천한다고 말하기는 조금 쑥스럽다. 혼음이나 마약 같은 것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추천' 따위의 말하고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이란 것은 늘 그래왔다. 추천할만한 문학은, 내게, 여전히 문학이 아니다.



성기완 시인 겸 뮤지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