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작가가 보여준 인간 영혼의 면면들 복사하여 반복, 재생하고파

존 버거
<의 글로 쓴 사진>을 읽고 난 후 나는 그 책 안의 모든 에세이들을 한 편도 빠짐없이 암송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시집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통째로 다 외우고 싶다. 왜 그럴까?

나는 워낙 게을러서 방랑과는 영 거리가 있는 작가이다. 방랑하지 않는 작가이기에 나는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결코 오를 수 없을 것이다. 시인 랭보는 19세에 절필을 하고 나머지 생을 방랑에 바쳤다.

작가의 방랑은 왜 특별한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한 비범한 영혼이 세계 곳곳을 섭렵하면서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이 같은 위대한 영혼의 방랑기를 굳이 외우고 싶진 않다.

다만 경탄하고 숭배할 뿐이다. 랭보는 <나의 방랑>이라는 시에서 말한다. "이 몸은 발걸음마다 시를 뿌렸노라." 정말이지 경탄하고 숭배할 만하지 않은가!

의 책은 작가의 방랑을 담고 있지만 작가 자신의 영혼이 개화하여 위대함에 이르는 과정과는 별 상관이 없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오히려 그가 방랑의 와중에 만난 노숙자, 맹인, 소녀, 혁명가, 예술가 등등 세계 곳곳의 인간군상이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포토카피photocopies'라는 책의 원제에서 나타나듯 작가는 자신이 만난 다양한 인간 삶을 마치 스냅 사진을 찍듯이 면밀히 관찰하고 꼼꼼히 옮겨 적는다. 책의 한 등장인물인 작가의 친구는 암으로 죽기 일주일 전에 그에게 말했다.

"새로 낼 책에서 과장하지 말게. 지나치게 표현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리얼리스트로 남아주게." 작가는 친구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준 셈이다.

의 리얼리즘 스타일은 '제시'의 글쓰기라고도 불릴 수 있다. 김소연 시인의 시 <너라는 나무>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너는 흔들리렴. 나는 쓸게. 네가 바라는 바. 재현이 아닌 제시의 문장으로." 타자의 흔들리는 삶을, 그 흔들림 속에 숨어 있는 영혼의 이미지를 들추어내어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김소연 시인의 말을 빌리면,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닌 제시(presentation)의 글쓰기. 그것이 의 리얼리즘이다.

사랑이란 결국 표현주의자가 아니라 리얼리스트의 몫이라는 사실을 나는 의 책을 읽으면서 떠올린다. 만약 그대가 어느 날 밤, 눈을 감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낮에 만났던 누군가의 표정과 말과 행동이, 그것들의 미세한 떨림까지 생생한 영상으로 마음속에 재생된다면 그대는 이미 사랑에 빠진 것이다.

"사랑해"라는 말이 아니라, 그대가 그/그녀의 이미지를 자기 자신에게 선명하게 '제시'하게 되는 그 때가 바로 사랑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내가 의 책을 다 외워버리고 싶은 이유도 실은 여기에 있다.

나는 그가 제시한 아름답고도 슬픈 인간 영혼의 면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복사(photocopy)'하여 내 자신에게 반복 재생해보고 싶은 것이다.

의 책은 그렇게 나로 하여금, 보잘 것 없는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별 볼일 없는 인간들과, 죽을 때까지 끝없는 사랑에 빠져보시라고 넌지시 권한다.



심보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