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불공평의 문제 푸는 열쇠[지식인의 서고]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아직 개봉하지 않은 터라 자세한 내용은 알래야 알 수도 없지만, '용서는 없다'라는 영화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이유는 그 제목의 강렬함 혹은 간명함 때문이다. 제목만 놓고 본다면, '용서는 없다'는 몇 년 전 개봉한 '복수는 나의 것'과 훌륭한 짝을 이룰 만하다.

물론, 근대 사법체제 안에서 용서의 반대가 반드시 복수라고 할 수는 없으나 법에 의한 처벌을 복수로 볼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해 여러 말들이 있는 걸 보면, 결국 문제는 죄(악행)를 묻고 벌할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냐로 수렴하지 않겠는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격률이 명시하듯, 복수든 처벌이든 그것은 누군가가 지은 죄에 대해 등가(等價)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세계에서는 그렇게 쉽게 등가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 내 눈 하나가 멀었다면, 상대방의 눈 하나를 멀게 하는 것으로 세상은 공평해질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억울하지 않을까. 게다가 사람들은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한 편이므로,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믿을 뿐 언젠가 가해자였을지도 모른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복수의 드라마로 점철된 희랍 비극 이래로 세상은 그래왔다.

아무튼 세상은 불공평하다. 누군가는 죄를 짓고도 잘 사는가 하면 누군가는 죄 없이도 불행하다. 이 문제는 풀기도 어렵지만, 풀지 못하면 살기도 어렵다. 가령, 모스는 <증여론>에서 포틀래치(potlatch)에 의해 선물을 베푸는 것으로 불공평을 해소하려는 오래된 관습을 보여준다. 혹은 헤겔이라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거론했을지도 모른다.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이 절치부심 노력해 출세하고 잘 살게 되는 것처럼, 불공평한 세상에 억울해 하던 노예가 노동을 통해 세계를 얻게 되는 시나리오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다. 신문의 미담 기사가 대개 그러하듯, 어디서는 아낌없이 기부하고 또 어디서는 보란 듯이 성공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것들로도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그때는 불공평한 세상을, 혹은 죄지은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나의 몫은 복수뿐이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세 번째 모델은, 지라르가 말했던 대로,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고 그 결과 복수가 역병처럼 세상을 휩쓸고 끝내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우리 모두의 복수를 쏟아 붓고서야 겨우 잠잠해질 위기에 처한 사회 아닐까.

널리 알려져 있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그만큼 복수와 용서의 문제를 고민한 작가가 다시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그만큼 불공평(차이)이라는 문제를 고민한 작가가 다시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위한 공평한 세상(천국)을 이루는 데 헌신하겠다는 조백헌 원장을 소록도 원생들은 왜 끝내 용서하지 않고 배신(을 통해 복수)했을까.

조원장의 첫 번째 죄는 자신과 원생들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서로 다르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된다. 생각해 보면,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 간에 갈등이 생기고 또 누군가가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아닌가. 누군가의 죄를 용서하는 일은 어렵다. 그렇다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스스로 죄를 짓지 않고, 또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타인의 행동을 죄로 간주하지 않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물론 용서이되, '관용'이라는 이름이 더 걸맞은 어떤 윤리일 것이다. 용서가 멀다면, 관용은 좀 더 가깝기를 바랄 뿐이다.



이수형 문학평론가